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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3:18

2011, MBC 예능PD 합격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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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명 가까운 지원자들 중 단 두사람에게만 주어진 MBC 예능 PD의 자리.
졸업을 앞두고, 처음 넣어본 전형에서 덜컥 주어진 합격 소식은, 내 인생 너무나도 큰 선물이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느낀, 혹은 새삼 확인한 사실들이-
언론사를 준비하거나, 혹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꿈을 쫓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될까 후기를 적어본다.


나는 거의 10년째 TV를 거의 보지 않은 채 살아왔다.
TV가 없었던 기숙사에서 3년을 살고나자, 그냥 보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PD가 되겠다는 사람이 TV를 보지 않는다는게 스스로 우습기도 했지만- 사실 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학기 중에는 학과 공부와 아르바이트, 교회 사역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방학이 되면 읽고 싶던 책들을 잔뜩 읽고, 여행을 떠나고, 친구들과 공연과 촬영을 하고, 글을 읽고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스펙도 없다.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 교육사업 지원과 국내 난치병 환자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한 <나눔의 기적> 프로젝트를 매년 진행했지만-
서류에 쓸 수 있는 봉사활동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 쫓아다닌다고 인턴 한 번 넣어본 적 없고, 자격증도 수상경력도 깨끗하다.
'우리끼리 좋아서 신나서'하는 일에, 누가와서 증명서를 써줄리야 없었으니까.
혹시나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싶어 봐둔 토익 840점, 그리고 군복무 때 받았던 '6성대우 모범장병 표창'이 내가 가진 스펙의 전부다.
그나마 내게 아름다운 대학생활의 추억을 남겨준 연세대학교-가 소위 '학벌'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중파 PD 지원자의 상당수가 명문대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마저도 그리 특별할 것은 아니리라.

시험준비도 안했다.
PD시험이 그동안 어떻게 나왔는지, 어떤 내용들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서류전형을 넣고 나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랑'이라는 카페가 있다는 것도 그때 들어서 알았다. 들어가보고 깜짝 놀랐다.
다른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언론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시험'준비를 안했을 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PD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생활 속에서 '좋은 컨텐츠를 만들기 위한 고민'은 끊임없이 해왔다.


내 꿈은, 'PD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꿈이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PD가 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할까?'가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어가려면 무엇을 해야할까?'를 고민해왔다.
그 꿈은, 반드시 PD가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나를 신나고 즐겁게 만들어 온 일들이 PD라는 직업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그 꿈을 PD라는 자리에서 이루어갈 수 있다면 더 없이 신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PD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떨어지면 또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다른 일을 얼른 찾아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NGO단원도 좋고, 독립프로덕션들도 좋았다. 그것도 기대가 되었다.
PD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란 생각이 오히려 두둑한 배짱을 챙겨주었다.

때문에- 내가 준비한 것은 'PD시험'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PD가 된다면, 어떻게 그 꿈을 이루어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만약 내가 PD가 된다면, 그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어떤 실력들이 필요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답은, 다른 어느 곳, 어느 때-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신실하게 인도해주셨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이기에, 미래를 준비하며 경영한다는 속빈 말보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큼 실속있는 삶도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1차: 서류전형
사실 가장 걱정되었던 전형이다.
특별한 경력사항도, 수상경력도, 자격증도, 봉사활동 시간도 전혀 없는-
깨끗한 내 이력서를 가지고도 과연 서류를 통과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를 충실하게 쓰고자 노력했다.
애써 튀는 이야기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지금껏 해온 내용들을 정해진 분량안에 최대한 내실 있게 담았다.

거의 '전무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서류가 통과된 것을 보면-
노력한 자기소개서를 인정 받았든지, 아니면 적당히 학벌로 걸러졌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다.
전자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다음은 2011년 전형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 전문이다.

1. 자기소개

콘텐츠의 힘은 세가지, 즉 이야기, 사람, 그리고 진실성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늘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즐거운 이야기를 발견하면 누군가에게 들려줄 생각에 안달이 났던,

그래서 학교에 가면 늘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이였습니다.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할 때도, 노트에 그린 만화가 전교를 오가며 탐독될 때도,

그리고 급기야는 카메라를 들고 나홀로 작은 영화와 UCC를 만들기까지,

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웃고 우는 사람들을 보는 그 희열에 몸부림치곤 했습니다.


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혼자 기차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낯설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여행을 시작했고,

그 역마살에 못이겨 나홀로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수많은 사람들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진실성'에 목말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록, 한 명 한 명은 참 좋은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빚어내는 갈등을 점점 더 보았습니다.

진실은 통한다고 믿지만, 이 사회에 그 진실의 소통과 이해가 참으로 척박하다는 사실이 갈수록 새삼스러워졌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전공했습니다.

소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커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능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의 세가지 힘은 결국 웃음과 눈물이라는 접점에서 만나고, 그곳에 예능이 있습니다.


의미있는 콘텐츠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콘텐츠는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는 의미는 무의미합니다.

누군가는 유치하다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삶의 유일한 위안이 바로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입니다.

의미보다 깊은 재미를 담는 PD가 되고 싶습니다. 그동안 MBC가 그렇게 해왔습니다.

바로 그 MBC에서 '예능으로 소통하는 사회'를 보고 싶습니다!


2. 나의 무한도전: 내가 열정을 다했던 경험

소설, 만화,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마침 친구들은 모두 예술을 전공하는 녀석들 뿐이기에,

저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나게 무대와 콘텐츠를 만들곤 했습니다.

그 한 번 한 번의 과정들 모두가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지만, 진정 열정을 다했던 기억은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끼리만 즐거워하는 것은 의미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우리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마침 다니는 교회의 추수감사절이 다가왔기에, '감사를 나누어보자'는 생각에

지역대학병원과 연계를 맺고 소아암 환자 수술비를 지원하는 콘서트를 기획했습니다.

그 결과 6명의 아이들에게 100만원씩 지원할 수 있었던 600만원의 시작은, 소박했지만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 감동은 '나눔의 기적'이라는 프로젝트로 매년 이어지게 됐고, 저는 2009년부터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2009년에는 '우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케냐의 식수펌프 공급사업과 지역의 난치병 아동을 후원하기 위한 2000만원을,

2010년에는 '북적북적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부르키나 파소, 부룬디, 탄자니아의 교육사업을 후원하는 1000여만원을 모금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을 만들기 위해 며칠씩 밤을 새며 홍보영상을 제작하고, 거리공연을 기획하고, 뮤지컬 대본을 썼습니다.

국내에서는 아프리카 도서관을 지원하는 NGO를 찾지 못해 미국 NGO들에까지 메일을 보냈고,

FAVL이란 이름의 NGO로부터 답장이 왔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10주에 걸쳐 목표했던 모금액을 달성했을 때는, 기뻐하는 친구 사이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지금은 탄자니아 공립교육시설을 후원하는 '날아라 블랙보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우리의 나눔으로 그곳에 기적을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 각박한 세상에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나눈다는 그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많은 기적을 만들어가기 위한 제 열정은 아직도 넘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는 그야말로, 최종면접까지 활용되는 중요한 자료다.

세 번에 걸친 면접과정 속에서, 면접관들은 두번째 항목의 <나눔의 기적>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나눔의 기적>은, 정말이지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를 나누고자하는 목적 말고는 다른 생각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들이 내가 PD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양분들을 제공했다.

진짜 실력은 진심 속에서 쌓이는 것일테다.

(3년에 걸친 <나눔의 기적>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었던 수많은 영상들 중 몇가지를 소개해본다)



서류를 넣고나자- 문득 불합격에 대한 두려움이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다른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격려에 대한 것이었다.

'넌 정말 PD감이야!', '니가 PD가 안되면 누가 PD가 되겠어!'- 같은 이야기들을 주변으로부터 늘 일상적으로 들어왔다.

기분 좋은 칭찬이긴 했지만, 그 말들의 무게는 불합격에 대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가 떨어지면 민망하니까-

조용히 입다물고 있다가 혹시라도 좋은 소식이 생기면 사람들에게 알릴까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 순간, 내 모습이 너무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두려움이 다가오자 이를 피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당당하게 마주하기로 결정했다.

수험표 사진을 그대로 다운받아 페이스북에 올려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나도 잘한 선택이었다.

수험표를 만천하에 까버린 마당에, 전형 과정 중에 이것저것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매 전형날마다, 그리고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애태워주고, 응원해주고, 기뻐해주었다.

그 모든 힘이 없었다면 과연 최종합격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싶다.

설령 불합격의 쓴 맛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과정들에 마음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의 격려가 크나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지원사실을 끝까지 숨기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2차: 필기시험
아마, 다섯 고개의 전형들 중에서- 시험보기 전날 가장 많이 긴장했던 단계가 아니었나싶다.

심지어 최종면접 전날보다도, 더 많이 떨렸었다.

이유인즉슨-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몇 년까지 스터디를 하며 필기시험을 준비해온 사람들과는 달리,

난 정말 아무것도 시험을 준비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객관식 시험에서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오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져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대강의 문제 유형들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방대한 양의 일반교양상식을 이제와서 공부한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짧은 시간에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MBC 홈페이지에 올라온 편성표를 보며 대강의 프로그램을 파악해 두는 것이-

필기시험 전 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공지사항에는, 필기시험은 객관식으로 출제되는 <교양상식>분야와, 예능PD직군에게 출제되는 <작문>의 두 분야라고 나와 있었다.

MBC의 작문시험은 대대로 상상 이상의 창의성과 의외성을 자랑하기로 유명했다.

"일요일 오후 2시"라는 제시어가 등장한다거나, "강남역 6번 출구를 나왔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작문을 하라는 등-

무얼 준비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글 쓰는 것은 평소에 즐겨해왔으니, 의외의 주제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글쓰기라면 오히려 유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양상식에 비해 작문시험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소문 역시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에-

어차피 준비한 바 없는 교양상식은 과감하게 잊고, 작문을 잘 써보자고 생각하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필기시험 당일날, 오히려 교양상식은 무난했다.

보통 문제집을 풀어가며 공부했어야 했을 듯한 문제들은 정말 '상식'에 가까운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책을 즐겨읽고, 정말 너무나도 기본적인 시사조차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리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난감하게 한 건, 연예/예능에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아이돌 그룹 네 개를 주고 멤버수의 총합을 묻는다든지, K-POP 가수의 히트곡들 중 작곡가가 다른 노래를 고른다든지하는 문제들은,

TV를 거의 보지 않고, 아이돌에도 통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반면, 다른 지원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 같은-

방송실무와 기술 등에 관련된 문제들은 쉽게 풀 수 있었는데, 대부분 전공과목 시간에 익숙하게 접하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PD가 되는데 '반드시 신문방송학을 전공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NO'라고 대답하는 것이 거의 모범답안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본인이 언론학도로서 자신의 전공 분야 외의 다양한 영역에도 늘 꾸준한 관심과 소양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다른 전공보다는 역시 신문방송학이 더 좋은 토양을 제공하는 것 같다. 

방송의 기본에 대해 배울 수 있음은 물론이거나와, 중요한 성찰을 제공하는 책들을 꾸준히 접하게 된다.

본인이 자신의 전공을 열정을 가지고 공부만 한다면- 방송과 언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일상적으로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다.

시시각각 등장하는 이슈와 실무현장의 문제들에 대해, 실력 있는 교수님, 학우들과 강의실에서 성찰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내가 PD 공채 전형을 치루는 과정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덕분에 필기시험에서도, 다른 지원자들이 비교적 어려워했을 법한 문제들을 쉽게 맞출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개의 문제 중에서 스물 서너개를 틀렸다.

모르긴 몰라도, 잘해봐야 평균, 아니면 그 이하 언저리쯤 되는 성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을 보면, 확실히 상식시험보다는 작문에 큰 비중을 둔다는 소문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물론, 그 날 필기시험장에 출제된 작문의 제시어가 모든 응시자들을 일대 혼란에 빠트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톡톡 튀고 창의적인 제시어가 등장하기로 유명한 MBC 예능 PD의 작문 시험에서, '한류'라는 너무나도 투박한 단어가 제시된 것이다.

말장난도 못하게 괄호 안에 '韓流'라고 한자까지 때려 박아놨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역시 전공수업 시간에 몇차례 다루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내용들이야 당연히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류의 기원, 과정, 양상, 효과, 부작용 등에 대한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측면들을 서술해봐야 승부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한류가 열풍을 일으킨 아시아 얘기를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800여 편의 글들 중에서 눈길을 끌려면 이건 아니다.

그렇다고 엉뚱한 소설을 원하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았다.

정확한 한자까지 병기해놨으니, 어느 정도 한류의 시사성을 반영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한류의 기본을 아우르면서도, 800편의 글 속에서 눈길을 끌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을 어떻게 써낼 수 있을까.

 

작문을 위해 주어진 70분 중 20분 정도가 지나고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 옆에 앉아있던 한 여자 지원자는,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채웠다.

어차피 내 안에 없는 이야기를 할수는 없다.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채워 넣자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것저것 쓸 말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한류', 즉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국 바깥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국문화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된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자 수없이 다녔던 여행의 경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이야깃거리들을 추려낸 다음, 의미의 흐름에 따라 엮어내자 충분한 분량이 나왔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첫 문장이 눈길을 끌 것.", "쉬우면서도 적당한 시사성을 담을 것.", "아주 참신하진 않더라도 끝까지 읽어볼 정도의 재미는 이어갈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내 생각을 쓸 것" 정도 였다.

 

정확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완성된 작문의 내용을 대강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현이나 문장 단위는 조금씩 달라도,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그대로 담긴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 호스텔의 객실은 적막했다. 혼자 떠난 배낭여행객의 재미가 무엇이겠는가.

옆 침대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벽안의 사내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나자 아니나다를까, 예의 그 질문이 따라 나온다.

"Where are you from?"

'코리아'라는 대답 뒤에 늘 따라나오는 단어들, "삼송, 지성, 횬대, 기아, 엘쥐, 미쓰비시, 토요타..."
나 거기 안다고 열심히 애써주는 저 애처로운 목소리를 하나하나 고쳐주는 것도 이젠 지쳤다.
그러는 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이탈리아 베니스란다. 뭘 하냐고 물었더니 작가란다.
와우, 베니스의 작가라, 이 넘치는 운치 좀 보소. 하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내가, 이탈리아 관광청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한 표본인지를 묻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더니 의뭉스런 목소리로 던지는 한 마디.

"하지만 그게 확실히 먹히지(It really works)."

한 나라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기업과 개인으로 치환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문화적 내공이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사람에게는 '에펠탑'이니 '몽마르트'를 이야기할테지, '까르푸'가 나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래도 최근 들어 박지성이나 핸드폰 말고도 이야기할 거리들이 생겼다.
한국산 드라마나 소위 K-POP들이 아시아를 넘어 서구 문화권에까지도 진출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문화 컨텐츠로도 한국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한류 열풍에 아직은 시큰둥했던 내가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케냐 나이로비 변두리 주택의 TV에서 '구준표'를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아직 케냐에서 한국의 드라마들은 그리 큰 인기를 끌고 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정작 아프리카의 진짜 한류는 다른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아프리카 곳곳에 자리잡은 한국 NGO들로부터다.
수많은 한국의 구호단체들이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시골마을에서도 'Be the REDS!"가 선명한 티셔츠를 입은 새까만 꼬마아이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프리카의 한류는 티셔츠와 함께 박탈감도 전한다.
알몸이 당연했던 마을에 티셔츠가 들어오면서,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탄자니아 작은 시골 학교에서 피아노를 만났다. 학교에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기에 팔을 걷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생전 처음듣는 피아노 연주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아이들이 신나게 뛰기 시작한다. 나름 한류의 중심에 섰다!
서투른 연주나마 온몸으로 맞춰 추는 춤이 제법 흥겹다. 이 마을에 초고속 인터넷이 들어왔다면 이 아이들이 모두 커버댄스를 추고 있었을까.
이들의 투박한 춤이 그보다는 훨씬 좋다.

한국이 흐른다 했다. 한 번 흘러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테다.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가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밖으로 흘러나가 버린 것은,
위대한 한류(韓流)가 아닌 그저 차가운 한류(寒流)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뿐이리라.
무언가를 열심히 흘려보내기 전에, 우리가 가진 것부터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바깥으로 흐르는 한류가 아닌, 우리 안의 난류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쓰고 나서도 께름칙했다.

그리 만족스러운 수준의 글은 아니었다.

상식시험도 별로였으니, 필기시험이 끝나고 난 내 기분은 그냥 피곤이 몰려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기를 통과했다면, 분명 심사위원들에게 소구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글 말고도 내 블로그에 있는 다른 글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실은 필기시험에서 써낸 작문은, 평소 내가 블로그에 쓰던 글과 썩 다르지 않았다.

 

블로그의 글들은, 그냥 내가 즐거워서 버릇처럼 쓰곤 하는 것들이다.

글솜씨 역시, 즐거워서 자꾸 쓰고, 많이 쓰고 하다보면 쌓이는 것 같다.

 

난 스터디를 한 적이 없고, 이후 면접과정들을 거치면서도 스터디를 했어봐야 별 도움은 안되었겠다는 생각들을 많이 했지만-

필기시험에서만큼은 스터디가 꽤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을 써내는지 읽을 수 있고-

내가 써낸 글의 장단점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상당히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번 MBC 전 직군의 필기시험 문제는 대단히 시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스터디의 덕을 본 사람들이 꽤 많았다.

스터디에서 썼던 작문을 거의 그대로 써서 합격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전처럼 그야말로 엉뚱한 문제가 나와버리면 오랜 스터디도 별 수 없다.

스터디에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글을 읽어보며 피드백을 주고 받는 것도 물론 훌륭한 경험이지만-

그보다는 역시, 다양한 분야에서 글쓰기의 대가들이 써낸 양서들을 꾸준히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이 평소에 항상 글쓰기를 즐겨한다면, 그 이상의 연습도 없지 않을까.

 


 

3차: 역량면접

면접부터는 마음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긴장할 법도 한데, 전날에도 푸욱- 잘 잤다.

사람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회사는 커녕 인턴조차 지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면접을 해본 경험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면이 면접관들 앞에서도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것 같다.

 

다만, 아침 9시부터 면접을 봐야하는 첫번째 조에 배정이 되었는데-

예능국이 있는 일산 MBC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이건 좀 문제 같았다.

신촌에서 얼마나 걸리는지도 궁금하고, 혹시나 헤맬까 길도 알아볼 겸 전날 저녁에 미리 들러보기로 했다.

 

저녁 7시쯤 도착한 일산MBC는 불이 얼추 꺼진 채 몇몇 사람들만 오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대기실로 사용될 장소에 <신입사원 공개채용 역량면접 대기장소>라고 써붙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로비에서 이것 저것을 구경하다가- 우연찮게 보안요원과 대화를 트게 됐다.

기껏해봐야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보안요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서로 통성명을 하고 전화번호까지 주고 받을만큼 친해져버렸다.

그는 MBC가 자기 같은 외주 직원들에게까지 여러 혜택들을 꼼꼼하게 챙겨준다며 회사 칭찬을 해주었는데-

그 얘길 듣고나니, 이 회사에 꼭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버렸다.

 

전날 미리 둘러본 덕분에 아침에 도착한 일산MBC는 낯설지 않았다.

집에서 너무 일찍 출발한 탓에, 시간이 남아버려 인근 식당에 들러 설렁탕으로 뱃속 뜨끈하게 아침밥을 챙겨먹고는-

카페에 들어가 랩탑을 펼치고 자기소개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있었다.

 

순간, 봐야지, 봐야지-하고 생각하다가 계속 못보고 있었던 <코이카의 꿈>이 생각났다.

내 자기소개서와 아주 잘 어울리는 MBC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어,

홈페이지에서 한 편을 서둘러 다운받아 앉은 자리에서 얼추 봐두었다.

 

대기실에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예상보다 너무 적은 수의 대기자였다.

그 날 하루 동안 모두 세 개조의 예능PD 역량면접자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첫 조에 속한 사람이 열 서너명쯤 되는 듯 했다.

그말인즉슨- 필기전형을 통과한 사람이 많아봐야 마흔명 남짓이라는 뜻이었다.

객관식도 잘 보지 못했는데- 내가 써낸 작문이 800명 중에 40여명에 들 정도로 괜찮은 수준이었나 하는 생각에 굉장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면접장에 들어가자, 면접관은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마침 가운데에는, PD로서 나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해온 김영희 PD가, 그리고 좌우 양쪽에는 잘 모르겠는 분들이 있었다.

(후에 질문들을 들어보니, 왼쪽의 면접관은 외부 기업에서 파견을 온 사람인 듯 했다)

다만 살짝 당혹스러웠던 것은- 김영희PD는 전날 밤 늦게까지 촬영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두꺼운 패딩점퍼에 양 손을 찔러넣고, 의자 등받이 기댄 채 피곤한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첫 질문은,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네요?"였다. 자기소개서에 적힌 MG 얘기를 하시는구나 싶었다.

봉사활동은 아니고, 친구들과 함께했던 프로젝트라고 정정해드렸다. 왜냐면 봉사시간을 하나도 받지 못했으니까.

"최근 다양한 미디어 등에서 봉사가 유행인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고나자,

"<코이카의 꿈>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따라 나왔다.

아침결에 한 편이라도 다운받아서 봤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많이 챙겨보진 못했지만 모니터링하는 수준에서 봤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코이카의 꿈>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평소 국제구호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해왔던 나는,

<단비>로부터 출발한 '방송'과 '구호', '재미'와 '의미'에 대한 내 나름의 고민들을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면접'이- '나를 평가하는 자리'라고 생각해버리면 나올 얘기도 안나온다.

저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평소 고민하며 키워온 생각들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면접용 답변들이 아니라- 내가 관심있는 문제들에 대해 늘 고민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능프로그램 중에 뭘 제일 좋아해요?"라는 질문이 나왔고, 그나마 인터넷 동영상으로 챙겨보던 프로가 <나는가수다>였기 때문에-

"네, MBC프로그램 중에서는 <나는가수다>를 제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채널에서는 뭐가 제일 재미있냐는 물음이 따라나왔다. 생각나는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나마 PD 시험 본답시고 MBC 예능 몇 개를 골라 본 것 말고는 본 바가 없으니.

허허 웃으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TV를 거의 안보는 편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대신 TV를 보지 않는 시간들 동안 주로 무엇을 했는지를 설명했다.

좋은 PD가 되기 위한 역량에는 TV를 많이 보는 것만큼이나 이러한 경험들이 중요하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면서. (웃음)

 

PD를 준비한다는 사람이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더구나 저 사람들은 '사람보는 눈'을 인정받아 저 자리에 앉아있는 면접관들이 아니겠는가. 고수를 속이려 들었다간 큰일난다.

 

다행히 면접관들은 TV를 많이보지 않는다는 내 이야기를 그리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 면접을 마치고 일어나려는 나에게-

"이번 단계 통과하면, 예능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조금만 더 열심히하고 오세요." 라는,

거의 합격 통보에 가까운 조언까지 들려주었다.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면접장을 빠져나왔고-

실제 결과발표가 날 때까지, 저 한마디에 괜한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 같다.

 

 

 

  

4차: 다면심층면접

3차 합격발표가 난 다음부터 4차 전형일이 올 때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들을 다운 받아서 열심히 보는 일이었다.

어우, 근데 역시 난 뭘 만드는 건 좋아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는 건 너무 피곤하다.

분명 잘 안보던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재미있긴 한데- 아무리 많이 봐야 하루에 3편 이상을 보는 건 무리였다.

나머지 시간은 다시 책을 읽기도 하고, 꾸준히 블로그에 옮겨적던 여행일기를 끼적이기도 하며 4차 전형을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에- 수험표를 깐 이후로 한단계 한단계 발표가 날 때마다 페이스북에 결과를 계속 올리던 내 글을 보고, 한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현직 MBC 예능PD 중에, 자신이 아는 형이 있는데- 이 친구가 나를 위해 일부러 그 형에게 연락을 해서 조언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문제를 미리 알아다주는 수준의 부정행위를 저지른 게 아니라-

먼저 합격한 그 형은 4차전형에서 어떤 과제들을 했었는지 경험담을 들려주는 정도였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강의실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같이 들었을 뿐, 밥 한 번 같이 먹은적도 없는- '친하다'고 얘기하기에도 어려운 사이의 친구였는데-

페이스북의 글을 보고 나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연락까지해서 조언을 구해준 그 마음이 큰 힘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되새긴 것이지만, 역시 수험표를 까기를 잘했다.

불합격의 민망함을 피하겠답시고 혼자 끌어안고 왔다면 과연 여기까지 오기나 올 수 있었을까.

 

 

아침 8시부터 여의도 MBC에 모인 지원자들은 버스를 타고 양주의 연수원으로 들어갔다.

이전까지 1박2일의 합숙평가로 이루어졌다던 과정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하루짜리 일정으로 단축한 듯 보였다.

4차전형까지 이르게 된 지원자는 모두 스물 네명. 이쯤되자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에라도 참가한 기분이다.

 

과제는 모두 네 가지로,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짧게는 20분, 길게는 40분의 시간 동안 커다란 전지에 주어진 과제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간이 지나면- 인사담당자들은 우리의 전지를 모두 걷어간 뒤, 면접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 앞으로 안내한다.

순서를 정해 한 사람씩 방 안으로 들어가면, 방금 내가 급하게 작성한 전지가 게시되어 있고-

나는 현직PD 앞에서 열심히 이 결과물이 얼마나 괜찮은지를 온 힘을 다해 피력해야 한다.

 

 

첫번째 시간은, <대장금>의 오프닝 화면을 보여준 뒤- 이 오프닝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트콤을 기획해보라는 과제였고,

두번째 시간은, 네 명의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말뚝이_<봉산탈춤>, 조의관_<삼대>, 홍길동_<홍길동전>, 엘리자베스_<오만과 편견>)을 제시하고는,

이 중 한 명을 선택하여 예능 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기획하되, 그 인물의 특성을 잘 반영하라는 과제였다.

 

그야말로 죽는 줄 알았다.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다.

첫번째 과제는 40분, 두번째 과제는 30분이 주어졌는데-

문제에서 요구하는 세부사항까지 꼼꼼히 마련해서 전지에 작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내공 대결이다.

 

프리젠테이션이라는 건, 나 자신이 그 내용에 자신이 있을 때 가장 뛰어난 법이다.

급박한 시간 동안 허겁지겁 만들어낸 기획안 자체는 이미 엄청나게 허술한 구석들이 내 눈에도 띄는 것을,

그것도 컨텐츠 기획에는 이력이 났으리만치 오랜 경험이 있는 현직 PD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려니 이야말로 진땀 빼는 경험일 수 밖에.

그저 내 개인사를 가지고 면접을 보는데 트집을 잡히면야 내 삶이니 나도 당당하게 할 말이 있겠지만-

엄연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기획안을 가지고 현직 PD가 흠을 잡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나름 구색을 갖추어 써내긴 했지만- 내 생각에 처음 두 시간의 내 기획안이 그리 돋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어찌됐든 내가 만들어낸 아이디어에 대해서 일단 내가 믿어주기로 하고-

부족하다고 지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순발력을 발휘하여 보완책을 계속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그나마 좋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다.

 

 

세번째 시간은, '당신은 장기휴가를 다녀온 어느 사무실의 직원인데, 휴가에서 복귀하자 사무실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상황을 주었다.

그리고는 여섯 가지의 수상쩍은 사무실의 단서들 가운데서, 해결해야 하는 우선 순위들을 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문제였다.

상황대처능력, 혹은 문제해결능력, 게다가 조직친화력 등을 평가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내 경험에 비추어 정성껏 우선순위와 그 이유들을 적어 넣었다.

 

실제로 이 과제를 심사한 면접관은, 과제 자체보다는- 내 평소 생활과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더 많이 던졌다.

이 역시- 군대와 교회, 그리고 몇몇 기관들에서 경험했던 다양한 형태의 인간관계들로부터 얻은 내 나름의 깨달음을 실컷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중요한 것은 요령이 아니다. 수많은 조직들이 있지만 어차피 사람사는 곳은 다 같은 곳이다.

그 어떤 갈등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고, 진심을 다해 대해주는 사람을 이길 재간은 없다.

세번째 면접관 앞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는 사실 이게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시간은 논술이었다.

보통 예능PD를 지원하는 지원자들의 경우, 논술 연습은 상대적으로 적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창의성과 순발력이 많이 필요한 예능PD의 전형과정과-

주어진 문제에 대해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답변을 써내야하는 논술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아 보이긴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미 세 단계의 과제들을 치르고, 매서운 눈초리의 현직PD 앞에서 진땀을 빼느라 녹초가 된 지원자들 앞에서,

'마지막 과제는 논술입니다'라고 말한 인사담당자께서는, 쏟아지는 원성과 탄식을 고스란히 떠안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논술과제도 확실히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지에는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역할을 했던 '삼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었고-

"조선의 언론기관이었던 삼사에 대해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이에 기반하여 MBC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논술하라"는 문제가 쓰여 있었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 평소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는 한, 40분 안에 써내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내게는 확실히 강점이 되었다.

불과 몇 주전에 끝난 지난 학기 동안, 내가 몰두해 있던 수업의 연구과제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언론과 공론장의 역할이었으며-

특별히 '유희적 목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공론장'이 구체적인 연구 주제였다. 이는 말 그대로 '예능 프로그램의 언론으로서의 역할'인 것이다.

 

시험을 위해서 했던 공부도 아니었고,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했던 연구도 아니었다.

정말 내가 궁금하고, 내가 알고 싶어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파고들었었드랬다.

일곱명의 조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최종 보고서는 밤을 고스란히 새워가며 거의 혼자서 작성하다시피 했는데-

누군가는 나의 이런 행동을 '손해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모르는 소리.

정말 그 주제가 궁금하고 공부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열 편이 넘는 논문들이 하나 같이 재미있고,

조원들이 열심히 모아온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물론 데이터에 유의미한 결과가 없다면 그만큼 망연스런 것도 없지만!)

 

열정을 가지고 연구했던 그 주제는, 여전히 풍성하게 내 머릿속에 내용들이 남아 있었고-

비슷한 주제로 서른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써냈던 나는, 그 내용들을 삼사에 대한 설명과 적당히 섞어 A4용지 한 면 안에 어렵지 않게 담을 수 있었다.

 

논술문을 텍스트로 한 마지막 면접에서, 다른 지원자들이 논술문과 관련된 질문을 거의 듣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나는 내가 써낸 글을 바탕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질문들을 다수 받았으며,

40분 동안 작성된 A4용지 한 장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좋아라 쏟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짜 내공은 이런저런 소식들에 기민하게 반응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날들에 최선을 다하는 걸음으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이- 그 어떤 요령도 능가할 수 있는 진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4차 전형이 끝난 당일에는 기분이 그리 개운하지 않았다.

그리 참신하지 못했던 처음 두 시간의 과제들과- 그 내용들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면접관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나간 바.

설령 4차를 통과한다 해도, 최종면접을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이쯤에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리고서 붙을 줄이야.

마침내 2천명 중에 뽑힌 최종 일곱명 안에 들었다. 이쯤 되면 이건 은혜다.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진짜 실력이라 한들 그 실력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감사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5차: 최종면접

4차 시험장에서 지원자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공유되던 이야기는, '최종합격자는 사실 4차에서 거의 결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최종면접에서는 심층적인 질문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신상이나 경험과 같은 비교적 부드러운 질문들이 많다고 했다.

뽑을 사람이 어느 정도 결정된 상태에서, 최종면접에는 몇몇 들러리를 더 불러놓고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그런 뉘앙스의 소문.

 

그럴만하다고 생각은 했다. 임원들과 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최종면접보다야-

다양한 과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4차 전형의 결과가 훨씬 구체적이면서도 계량화가 가능할테니까.

 

물론 그래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들러리로 불려가는 것인지, 예비합격자로 불려가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설령 그걸 알았다한들 그 또한 무슨 의미겠는가.

만에 하나 내가 예비합격자의 자격으로 최종면접에 간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대충대충 면접에 임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행여 그런 지원자가 있다면, 내가 면접관이라면 붙이기로 작정했어도 떨어뜨리고 싶을 것 같다.

그러니, 이러니저러니 어쩌니해도- 어쨌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면접장에 오긴 했지만- 그래도 심층적인 질문들은 하지 않는다니 슬쩍 부담이 덜했다.

자기소개서에 기반한 개인적인 내용들이라면야 얼마든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더라 통신은 믿을 게 못 된다. 누가 부드러운 질문이라고 그랬어.

녹초가 되었던 4차전형보다 한참은 더 진땀을 빼야했던 하루였다.

 

 

아침 9시쯤 여의도 MBC에 모인 최종면접자들은 스무명 정도 되는 듯 했다.

최종면접은 일곱개의 직군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하루씩, 이틀에 걸쳐 진행이 되는데- 나를 포함한 예능 PD는 모두 일곱명이 와있었다.

스무여명의 지원자들은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이동했다.

먼저 '한중문화원'에 들러 간단한 전시를 구경했는데, 이 와중에 각 직군의 본부장들이 해당직군의 지원자들과 함께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면접을 보기 전 서로 간단하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들 '이미 면접은 시작되었다'라는 것쯤 생각하고 있었을테고, 편안해 보이는 분위기 이면의 보이지 않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자리를 옮겨, 어느 리조트의 연회장으로 향했는데- 직군 별로 원형테이블에 각각의 본부장과 함께 앉아 점심식사로 코스요리를 먹는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된 것이다.

 

후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른 직군의 경우, 예의 그 카더라 통신대로 해당 직군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보다는 개인적인 질문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예능본부장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예능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해를 품은 달> 봤나? 원작 소설하고 비교했을 때 뭐가 더 재밌지?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해를 품은 달>을 가지고 30분 이상 지원자들과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난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 TV를 거의 안 보는데! 그나마 모니터링 한다고 MBC예능만 몇 개 챙겨봤지만 저건 드라마인걸!

일곱명의 지원자 중에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 한 명 뿐인듯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최종면접은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이고,

덕분에 나는 <해를 품은 달>이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나마 약간의 지형은 읽을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를 품은 달>이야기는 가지를 쳐 <뿌리깊은 나무>와 <성균관 스캔들>로까지 이어져 나갔는데-

역시 난 아무것도 본 녀석이 없다.

그렇다고 안 본 드라마를 봤다고 잡아 뗄 수는 없었다.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주제에 관련된 내 생각은 최대한 열심히 전달하고자 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종면접까지 왔을 때도, 불합격에 대한 두려움은 잊기로 했다.

'나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 생각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또 신나게,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찾아보리라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로부터 나를 자유로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첫번째는 어색한 긴장이다. 일곱명의 지원자들 중 몇몇은 상당히 긴장된 것 같아 보였다.

버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는 분명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좋은 느낌의 사람이었는데-

면접이 진행되는 자리에 앉은 모습은 확실히 굳어 있었다.

말하는 입 말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몸, 그리고 군대를 연상시키는- 지나치게 격식을 갖춘 말투.

뭔가-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어른벗'이 많은 사람이다.

환갑을 앞둔 고등학교의 은사님, 교회의 목사님, 대학의 교수님, 군복무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간부들,

그리고 과외를 하며 만난 수많은 학부모님들,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생각해봐도, 나보다 한참 어른인 분들과 보내는 시간이 또래들과 보내는 시간 못지 않게 많았다.

때문에- '예의를 갖추면서도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방식이 꽤나 익숙해진 편이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방식은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편이었다.

 

사실 솔직히 돌아보면, 나를 포함한 일곱명의 대답은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고- 또 조금만 생각을 하면 그 자리의 누구든지 말할 수 있을법한 내용들이었다.

면접관도 역량면접 때처럼, 서류를 가져다 놓고 면접 중간중간 뭔가를 체크하지도 않았다.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말의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그 속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캐릭터'에 주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말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던 내가 면접관의 주의를 끌지 않았을까 싶다.

 

두번째는, '눈에 띄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말의 내용만 두고 봤을 때는 그리 돋보이는 사람은 없었다고 얘기는 했지만- 실은 다른 의미에서 눈에 띄는 지원자는 있었다.

원형테이블이었기에- 본부장님은 한 사람씩 발언 기회를 줄 때는 앉은 차례대로 순서를 돌렸고,

덕분에 계속 마지막에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지원자였다.

 

그 지원자의 답변은 시종일관 남달랐다.

본인의 성격도 있는 듯 했지만- 당연히 마지막 발언순서인만큼, 앞사람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꼭 짚어내곤 했다.

아마 다른 맥락을 배제한 채 내용만 놓고 분석한다면 상당히 돋보이는 지원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면접관이라면 왠지 저 사람은 뽑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여유를 넘어, 어딘지 '난 이 사람들하고는 달라요.'라는 느낌, 유독 다른 대답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랄까- 함께 대화를 한다면 그리 기분이 유쾌할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맞았던 모양인지, 꽤 눈에 띄는 지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합격자 명단에 그 사람은 없었다.

 

 

진부한 대답이지만, 중요한 건 역시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막연하게 진심을 다해서 솔직하게 얘기한다고 능사는 아닌 것 같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정말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알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부딪치고 생각하고 경험하며, 그 속에서 내 나름의 소신과 신념을 만들어가야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 내어보일 수 있는 진심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리라.

 

동시에- '내 진심은 너희들과는 달라'라고 말하며 안하무인이 되는 것도 위험하다.

나의 소신과 다른 사람의 소신이 만나, 더 나은 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 또한 나의 소신만큼이나 중요한 것일테다.

스터디를 하는 것도 좋지만, PD뿐만 아니라 실은 다른 어떤 분야를 도전하는 사람들이든지-

좀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몸으로 부대끼며, 나만의 관점과 생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낮에는 밖에서 사람들과 땀을 흘리며 어울리고, 해가지면 책상 앞에 앉아 경험의 조각들을 갈고 닦아 성찰의 보석으로 담아가는 과정들.

광장과 밀실은 늘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 같다. 그 균형감각만큼 쉽지 않을 것도 없을테다.

 

 

2천명 중의 두 명-은, 실력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자리 같다.

분명 실력만 따졌을 때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과정을 인도하셨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역량면접을 보기 전에- 아무래도 PD를 뽑는 자리이니, 기획안을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했다.

보통 어떤 맥락이 주어지고 이와 관련한 프로그램 기획안을 묻는 경우가 많을테지만, 그 맥락이라는 거야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냥 아무런 맥락 없이 내가 예능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뭘 만들고 싶을지를 고민해봤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좀 더 많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을 때 얻은 대답은 '뮤지컬'이었다.

뮤지컬 작품을 감상한 숫자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에 뒤지지는 않을 정도고-

뮤지컬이 좋아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까지 쫓아가서 몇작품씩 보고 온 경력도 있다.

무엇보다, 고등부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각본, 연출, 작사, 작곡, 미술, 홍보를 도맡아, 천명 관객 앞에서 뮤지컬 무대를 올리기도 여러번 했다.

뮤지컬만큼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바, 뮤지컬을 소재로 한 예능프로그램을 몇가지 구상해봤다.

결국 역량면접 때 이를 물어보는 질문은 없었기에, 그냥 노트 안에 묵혀두었었드랬다.

 

진짜 사건은 최종면접때 일어났다.

최종면접때 예능PD 직군은, 세시간 여의 면접시간 동안 거의 예능본부장님이 면접을 다 진행했고-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사장님과 부사장님이 각각의 테이블을 잠깐씩 다니며 지원자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장님은 자리에 왔을 때, 특별히 지원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테이블에서도 그냥 관련 직군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들을 잠시 펼쳐놓고 이동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테이블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사장님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2012년에는 내가, 뮤지컬에 관심이 좀 있는데 말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MBC가 기획해서 괜찮은 뮤지컬 작품을 하나 만들어보고,

더불어 예능 PD들이 뮤지컬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까지 말을 했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뮤지컬을 평소에 워낙 좋아해서- 이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몇가지 생각해봤다고 말을 꺼냈고,

내가 구상했던 프로그램들과 내 뮤지컬 경험에 대해서 줄줄 쏟아내고야 말았다.

나름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던 사장님은 너무 시간이 길어진다 싶었는지 중간에 내 말을 중지시켰지만-

아마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인상을 남기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사장님이 동석한 동안 말을 했던 지원자는 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종면접 평가에서 이 사실이 감점으로 반영되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명 주류는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런 경력도 스터디 경험도 없이 이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나긴 전형과정을 거쳐 합격이라는 달콤한 산에 이르기까지 느꼈던 것은-

스터디를 했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겠다는 생각들이었다.

그래도 TV 모니터링은 좀 할 수 있었을테니 예능프로그램들 얘기할 때 진땀은 좀 덜 흘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내 생각에, 이는 예능PD에 한정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어느정도 전문적이고 시사적인 소양이 필요한 기자나, 편성PD와 같은 직군들은, 분명 여러가지 내용들을 준비해야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테다.

또, 내가 신문방송학을 정말 즐겁게 공부했던 사람이라서 가능한 얘기일수도 있다.

방송과 언론에 대한 고민들을 4년에 걸친 전공공부 속에서 끊임없이 해왔기에 중요한 소양들을 갖출 수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전형 과정들 중에서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내 조각들은,

내가 정말 가슴이 뛰어서, 내가 정말 눈물 겹도록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쫓아다녔던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경험, 진짜 실력-은 먹물과 책상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 땀과 맨발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늘 함께 가야만 정말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난 그리스도인이고, 내 삶의 과정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열심히 따르며 살아왔다.

언뜻 당장은 손해고, 너무 나이브한 반응이고, 몽상가적이라는 핀잔을 듣는 순간들에도 나름 꿋꿋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은 내 꿈을 위한 중요한 기로에서 가장 큰 재산으로 나타났다.

덕분에 이 기적과 같은 결과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실력'으로 인한 '내 삯'이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내 마음이 정말로 그렇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다.

 

앞으로도 난 '지금, 여기'를 살아가며- '몸과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자기 일인 것처럼 눈물을 흘려주던, 나보다 더 뛸듯이 기뻐해주던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PD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들에게, 끝까지 지켜보며, 우리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며 가자고 말하고 싶다.


http://www.cyworld.com/miracleofgiving/9261878


노트북에 옮긴 후 삭제!

?
  • ?
    황예슬 2015.10.09 16:15
    너무 잘읽었습니다!:)) 읽는동안 무릎을 탁 치며 맞아 이래야하는데 하는 부분도 많았구요! 잘 읽고 갑니다.
  • ?
    예능pd지망생 2020.08.30 00:30
    원본이 삭제된 글인데 여기에 아카이빙 되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엄청 유익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
    MBC두고봐 2023.08.01 13:45
    안녕하세요 우연히 검색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지난 2021년부터 준비를 해왔는데, 그간 서류에서도 수없이 떨어지고 필기, 실무 면접, 최종 등에서 다양하게도 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게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채워보려고 했으나 사실 혼자 고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어둡기만 한 터널에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것 같아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늘 평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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