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1/2010010100589.html
서울대 30대 과학자 김현진·남좌민·박윤
국내 연구능력 세계적 유학 꼭 필요하진 않아 정부도 과학투자 늘려야
"1년에 논문 10편 쓸 것" "원천기술 모두 상용화" 다부진 새해 다짐 밝혀
2010년 새해를 하루 앞둔 지난 31일 오후 2시, 겨울방학을 맞은 서울대 캠퍼스는 한산했다. 관악산 자락에 있는 제2공학관 213호 지능제어 연구실. 형광등 불빛 아래 두꺼운 공학책들과 비행기 모형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공학 논문이 가득 쌓인 책상에 세 명의 젊은 과학자들이 차례로 걸터앉으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얼마 전에 발표하신 연구논문 잘 봤어요. 쿨(cool)하던데요."
세 과학자는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에서 촉망받는 30대 교수들이다. 김현진(35)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와 남좌민(37) 화학부 교수, 박윤(38)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학계에 젊은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 교수는 "학생들은 방학이 좋을지 모르지만 교수들은 이때가 한창 연구할 때라 연말도 따로 없다"고 했다.
무인 항공분야를 연구하는 그는 기계항공공학부의 유일한 여교수다. 광주과학고와 카이스트를 5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만 26세에 미국 UC버클리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수재(秀才)다. 2004년 만 29세의 나이에 서울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그는 이듬해 최우수 강의교수상을 받았다.
나노바이오 분야의 전문가인 남좌민 교수는 2010년을 화려하게 출발한다. 그의 논문이 세계적인 과학전문 월간지 '네이처 머티리얼스(Nature Materials)' 1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남 교수는 신종플루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등 감염성 질병을 수시간 내에 진단해 상용화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논문으로 발표한다. 그는 2006년 미국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곧바로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로 임용된 그해 남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화학회가 주는 '빅토르 K 라머상'을 받았다. 이 상은 박사학위를 받은 지 5년 이내의 젊은 과학자들 가운데 촉망받는 인재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다.
- ▲ 지난달 31일 서울대 제2공학관에 과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30대 교수 3명이 모였다. 교수들은 모형비행기 옆에서 새해 연구 계획과 소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왼쪽부터 김현진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남좌민 화학부 교수, 박윤 물리천문학부 교수./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박찬호처럼 구레나룻과 턱수염, 콧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박윤 교수가 대뜸 물었다. "방학하고 나서 지금 일주일째 수염을 기르는 중인데. 어때요, 괜찮아요?"
그는 차세대 메모리사업 핵심 분야인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전자의 자기적 방향을 뜻하는 '스핀(spin)'과 '전자공학(electronics)'의 합성어) 분야에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1998년 미 플로리다대에서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 해군연구소(NRL)에서 국방분야 연구를 담당하던 박 교수는 2001년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가 함께 일하자고 했는데도 뿌리치고 서울대행을 결정했다. 박 교수는 2002년 세계적인 과학잡지인 '사이언스(Science)'지에 '스핀트로닉스에 관한 연구'논문을 실었고, 2008년에는 늘어나는 힘에 견디는 능력을 2배로 높인 금속재료를 개발해 '네이처 머티리얼스'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연구원이 아닌 교수가 돼 책임감을 갖고 연구에 임하고 싶어 서울대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석·박사를 마친 이들은 "우리나라 대학의 '실적 내기'식 연구 문화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남 교수는 "서울대에 임용되자마자 논문실적에 대한 압박이 커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단기간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일부 학과의 경우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는 자격요건으로 국제적인 저널에 10여편의 논문을 쓰도록 하고 있어 논문 게재실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무인항공과학처럼 사회적 파급 효과가 약한 분야는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대형 연구프로젝트가 드물기 때문에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데 제약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과학에서 '희망'과 '보람'을 찾는다. 김 교수는 "의학전문대학원이나 고시를 보며 방황하다 다시 돌아온 학생들이 '역시 과학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할 때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남 교수는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한국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연구성과를 내고 싶어 귀국했다"며 "연구 못지않게 학생들을 훌륭한 과학자로 키워내는 교육의 중요성을 점차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국내 대학원으로 진학하라고 하면 삐쳐요." 박 교수는 "박사과정은 사실 대학보다 지도교수가 중요한데, 학생들이 외국 대학만 선호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남 교수도 "이제 우리나라 대학들도 외국 유명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우수한 연구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우수한 학생들이 외국 대학으로 쏠리거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정부가 과학분야에 투자를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젊은 과학자들의 경인년(庚寅年) 새해 소망은 다부지다. 남 교수는 "2009년에 개발한 원천기술이 새해엔 모두 상용화될 수 있도록 시도해 보겠다"며 "인간의 모든 질병을 예방하는 유전자 서열지도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도 새해 포부"라고 말했다. 박 교수의 새해 소망은 '논문 10편 쓰기'다. 그는 "처음에 서울대 왔을 때 '1년에 논문 10편씩 쓰자'며 스스로 목표를 세웠는데, 지난 9년간 목표를 달성한 해가 단 한 번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지상 로봇과 비행 로봇의 모든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더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김 교수는 "새해엔 공대에 여학생이 많이 들어와, 남학생뿐인 학과에 여제자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도 소망이라면 소망"이라고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