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말도 안 되는 진실가리기였다. 그날 동아일보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을 보도하지 않았다. 대신 '광주일원 데모사태'라는 3단 제목 아래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단 한 줄짜리 기사만을 실었다. 발표문을 그대로 실어 사태를 호도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몇몇 신문은 달랐다. 계엄사 발표문을 전문 게재하고 시민들을 폭도인 양 몰아붙였다. 광화문 등지 가판소년들은 계엄사 발표문에 빨간색연필 도배를 한 뒤 "광주일대 데모 격화요!" "군경 5명 사망, 지역감정 유언비어 난무!" 등을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딱 한 줄, 그것도 별 내용 없는 사실 적시 기사에 눈 돌리는 독자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 몇 만 부가 팔리던 동아일보 가판은 그날 몇 백 부도 나가지 않았다.
동아일보엔 항의전화도 빗발쳤다. 대부분은 "군의 엉터리 발표문을 기자 양심상 도저히 보도할 수 없었다."는 사정을 이해한다며 오히려 격려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호도하는 발표라 하더라도 역사의 기록 차원에서 신문에 실어야 했다"거나 "계엄사 발표문을 고스란히 믿지는 않더라도 그걸 보며 사태의 심각성은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항의했다. 사태를 전혀 파악할 수 없게 한 '단견'이라는 것이었다.
사회부장이 바로 그런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계엄사 발표대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수도 없고, 그러자니 실상의 끄트머리마저 보도를 못하게 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사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특히 가판판매가 완패했다는 소식 탓에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계엄사 발표가 있었던 바로 그날 오후 군은 본격적으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체를 손수레에 싣고 항의시위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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