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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를 증폭해주는 트랜지스터는 벨 연구소에서 윌리엄 쇼클리의 책임 아래 존 바든 그리고 윌터 브래튼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트랜지스터는 0과 1의 전기적 신호를 받아내기 때문에 라디오나 마이크 뿐만 아니라 CPU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디지털 시대의 시작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중요한 발명품인 만큼 트랜지스터개발에 관여한 세사람은 모두 노벨상 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 윌리엄 쇼클리는 회사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사직서를 제출한다. 좀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상업적인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고 싶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탠포드 대학의 프레드릭 터먼은 윌리엄 쇼클리를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를 스카우트 해온다.  윌리엄 쇼클리는 사람들을 모아서 트랜지스터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윌리엄 쇼클리는 실패를 반복하였고 툭하면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윌리엄쇼클리의 행동들에 인간적으로 화가났던 8명의 직원이 동시에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간다. 이에 격분한 윌리엄 쇼크리는 이들을 8인의 배신자라면서 평생토록 미워했다. 

8인의 배신자는 페어차일드 그룹에서 150만달러의 투자금을 받고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창업한다. 그리고 8인의 배신자들은 실리콘 소재를 사용한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그 동안 불가능했던 트랜스터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하였고 8인의 배신자가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그 후 페어차일드는 시대의 기술 선도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페어차일드 그룹은 8인의 멤버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았고 회사 본사 사람들을 낙하산식으로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보냈다. 이에 불만을 느낀 8인의 배신자들은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두었다. 멤버중 리더 역할을 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만이 최후까지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페어차일든 본사에서 보낸 사장과의 불화가 커지면서 로버트 노이스는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회사를 그만둔 로버트 노이스는 고든무어에게 함께 회사를 창업하자고 제안한다. 원래부터 단짝사이였던 고든무어는 로버트 노이스의 제안을 혼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그룹과 연결시켜준 뉴욕의 금융가인 아서록에게 투자자를 모집해달라고 부탁한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가 새로운 사업을 한다고 하자 미국 전역에서 투자자들이 줄을 섰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그 동안의 여러 실적 덕분에 반도체 분야에서 슈퍼스타와 같은 존재였다. 둘이 작성한 사업 계획서라고 해봐야 냅프킨에 적어둔 메모밖에 없음에도 불과하고 단 하루만에 250만달러나 되는 돈을 투자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자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그 둘은 업계에서는 유명인사였다. 

처음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는 회사이름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Noyce-Moore Electronics)로 정했다. 하지만 노이즈가 많다(Noise Moore)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의견에 따라서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를 조합해서 회사이름을 인텔(INTEL)이라고 결정한다. 인텔의 첫번째 직원은 앤디 그로브이다. 앤디 그로브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출중한 실력을 명성을 드높였던 직원이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그리고 앤디 그로브는 완벽한 삼두체제를 이루며 인텔의 성공을 이끌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하나의 기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까지 없었던 제품을 개발하려했다. 이러한 고민끝에 등장한 제품이 바로 메모리이다. 로버트 노이스가 인텔이 만들어야 할 제품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면 실제의 시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고든무어였다. 로버트 노이스는 설계를 그렸다면 이를 구현한건 고든무어였던 것이다. 

우리가 CPU 전문 회사로 알고 있는 인텔이지만 사실 인텔의 시작은 메모리회사였다. 그런데 메모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대량생산이었다.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대량 생산 과정에서 번번히 좌절되었다. 이때 활약한 사람이 바로 앤디 그로브였다. 1969년 첫번째 메모리가 개발됐지만 실제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이었다. 앤디 그로브는 공장의 모든 설비를 직접 셋팅하였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뽑고 교육을 시켰다. 초기 메모리의 양산율은 10% 밖에 안되었다. 10개를 만들면 9개가 불량품이었는데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앤디그로브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렸고 나중에는 성공률을 50%로 끌어 올렸다. 이때 앤디그로브는 먼지가 반도체 생산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미세먼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진복을 최초로 고안한다. 인텔의 광고를 보면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이와 같이 방진복은 어느덧 인텔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인텔의 창업자를 로버트노이스와 고든무어로 알고 있지만 앤디 그로브 역시 창업자 대우를 해준다. 앤디 그로브는 그 자신 스스로 창업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만약 자신을 제외하고 창업자를 이야기하면 화를 낼 정도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 그리고 앤디그로브의 활약 덕분에 인텔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후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면서 벤처 신화를 완성한다. 인텔이 실리콘 밸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실리콘 밸리라는 단어 자체가 사실은 8인의 배신자들을 취재하던 돈 회플러가 탄생시킨 말이다. 특히 8인의 배신자들의 리더는 인텔의 창업자인 로버트 노이스였다. 그래서 로버트 노이스는 실리콘 밸리의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버트 노이스가 현재 인텔에게 숙명의 라이벌인 AMD의 탄생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독립한 제리 샌더스와 동료들은 AMD를 창업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하지만 인텔과 다르게 투자를 받지 못했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로버트 노이스는 전 직장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일부러 AMD에 자금을 투자한다. 업계의 슈퍼스타인 로버트 노이스가 투자를 한다고 하자 이 소식이 빠르게 외부에 알려졌고 덕분에 AMD는 쉽게 창업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는 AMD와 인텔은 숙명의 라이벌이지만 이 사건은 인텔이 실리콘 밸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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