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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14:32

카다피의 일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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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정권붕괴로 독재자 카다피가 퇴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되어 가고있다는 소식이더군요. 이 시점에서 카다피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관해서 한번 알아봅시다.

 

카다피는 사실 카타스트로피의 줄임말이라 카더라

리비아의 혁명지도자라고도 하나 주로 독재자라고 평가된다. 천하의 개쌍놈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9/Muammar_Abu_Minyar_al-Gaddafi_in_Dimashq.jpg/225px-Muammar_Abu_Minyar_al-Gaddafi_in_Dimashq.jpg?align=right

Contents

1 성장과정
2 집권과정
3 미국과의 악연과 범아랍주의
4 여담


 

1970년부터 리비아의 총리 겸 국방장관이며 동시에 리비아의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까지 다 해먹고 있다. 과거 중동 일대에서 초강경 반미성향 지도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 극단적인 언사와 기행으로 인해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미국과 관계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기가 많이 죽은 편이었다. 2009년 UN 연설때 말한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하고 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건설사를 통한 대수로 건설 등 경제 발전을겉보기에 그럴싸하게 억지로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해당 과정에서도 특정 민족을 더 우대하고, 가족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반서구권 언행을 줄이고 가족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며 적절선에서 은퇴했다면 세간의 평가가 그나마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골수처럼 고집하다가 아래에 서술했듯 반대 세력의 분노를 폭발시켜버렸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반대세력을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살육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로 인해 결국은 서방의 군사공격을 받게 된 상황. 오디세이 새벽 작전 참조.


 

참고로, 그의 이름은 나라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Gaddafi', 'Kaddafi', 'Qadhafi'). 한국의 경우 03년 12월 55자 외래어 심의회에서 국립국어원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로 규정한 상황이다.


 

1 성장과정 

1942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 출신으로 사막 한가운데 천막에서 태어나 그 후 리비아 남부지역인 페잔(!?)에서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952년에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벵가지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2 집권과정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대위[1]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해외 순방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국가의 중추기관도 유혈사태 없이 간단히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74년에는 정치이론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여 혁명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다음 해 그의 정치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나왔으니, 이것이 녹색서(The Green Book)이다. 1977년 소위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인민위원회서기장에 취임했으나 1979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 하에 돌아가고 있다.

3 미국과의 악연과 범아랍주의 

1969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대통령과 함께. 왼쪽이 카다피.
집권 이후 철저한 반미를 외치며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고, 옛 종주국인 이탈리아 사람들을 강제추방시켰다. 외국의 석유 메이저 또한 모두 내쫓고, 석유를 국유화해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2] 자신의 정치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완전무결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일대 혁명을 주도했는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 금지, 아랍사회주의에 따른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구상하였지만…야당이 있어야지.

자신의 우상인 나세르처럼 범아랍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시도도 했다. 그 결과로 1972년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을 구성하는 데 합의해 그해 7월 공식 출범했지만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추진하면서 1977년 7월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열불나서인지 이집트 국경에 상당한 규모로 공습을 가했다. 하지만 이집트군의 역습으로 되려 리비아군이 압도적으로 패했다.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시리아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 합방은 무산.

제3세계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에 대한 철권 독재, 각종 인권탄압, 테러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유럽미국이스라엘에 대한 각종 초강경 테러를 지원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88년 크리스마스 날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해 27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팬암기 폭파사건을 들 수 있다. 카다피가 테러의 용의자를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자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를 '테러리스트', '미친 개'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3] 경제제재를 시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이미 막대한 재원을 확보한 그를 막지는 못했다.

카다피의 이러한 행각에 빡친 미국은 카다피에게 겁을 줘서[4] 테러에 관한 지원을 끊키 위해소규모 공습을 벌였고 그 결과 그의 양녀가 희생되었다. 그 영향으로 미국의 공격을 받거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랍계 테러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잠시 데꿀멍하기도 했다.[5] 이후로 친소련주의를 강화하면서 러시아제 무기를 많이 도입했다. 하지만 이 당시 이웃 차드와 우라늄이 가득한 지역을 두고 영토분쟁을 일으켰으나 되려 차드군에게 밀린 바 있다. 이른바 토요타 전쟁. 그래서 차드에 대해선 직접적인 무력 간섭을 삼가하고 대신 흑인계 앙헬 족과 백인 및 아랍계 혼혈에 가까운 투아레그 족의 무장을 서로 지원하여 차드를 내전 상태로 만든 것에 다른 미국 및 유럽 나라들과 같이 기여했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고 있다. 심지어는 9.11 테러 이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에 마구 적의를 뿜고 있을 때 데꿀멍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어 부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오오 그거슨狂宗폐하의 위엄 2003년 공개적으로 반미정책 중단과 함께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자진폐기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사실상 GG선언. 그리고 2004년 팬암기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도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줬다.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6]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도 받아들였다.

2011년 현재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상황이고, 여기에 무력진압을 천명하면서 유혈사태를 빚는 바람에 국내외에서의 압박이 고조되고 있어 이 모든 게 쓸려나갈 위기에 처했다. 퇴진하지 않은 이상 현재로선 집권 41년차로 전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는 국가원수다.

2월 22일에 가진 국영TV를 통해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나 줄 수도 없다. 나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리비아 민주화 운동은 너죽고 나죽자라는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가게 생겼다.

2월 23일에 나온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의하면 최근 측근에게 '리비아를 되찾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리비아를 소말리아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한다.천하의 개쌍놈 그리고 이건...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네 놈이건, 미국이건, 유럽이건, 그 누구도! 리비아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테다! 이어, 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진짜로 내전 발생.리비아 전역에서 유혈충돌

TV 연설에서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57년이나 왕위에 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나 "알 카에다가 시위대에 마약을 주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마약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명언개드립을 시전하면서 정신상태마저 의심받고 있는 처지에 몰렸다.#

3월 20일 시작된 다국적 연합군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총력으로 맞서겠다고 큰소리쳐놓곤 부랴부랴UN과 오바마에게 공격을 멈춰달라고 애원하고 있다.폭격할 땐 맘대로였겠지만 휴전할 땐 아니란다#

2011년7월2일 뉴스에서 "나토 공습 중단 안하면 유럽 공격"할것이라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지지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육성 녹음을 방송했다고 한다. 유럽이 아무리 천조국보다 못하고 반전여론 등으로 인해서 전쟁이 쉽지 않다지만 진짜로 한번 손대면 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될수도 있을텐데... http://www.ytn.co.kr/_ln/0104_201107020615288087

추가 확인 바람.

4 여담 

  • '국가평의회 의장' 직함 다음으로 카다피가 자주 불리는 호칭은 '대령'이다. 카다피가 권좌에 오른 이래 국가원수란 개념을 계속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리비아 사람들의 인식은 이미 '대령'을 국가원수의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이 나라 사람이 아닌 정상적인 타국 사람들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라는 양반이 고작 대령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그게 다 역습의 샤아를 안 봐서 그렇다 굳이 혁명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령이란 명칭을 고집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으나 일단은 나세르 빠돌이 설이 우세하다. 대위였던 카다피가 숭배하는 아랍권 지도자인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이 왕정붕괴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계급인 대령을 따라 진급한 뒤 그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는 설. 여기에 대령에 진급한 이후 혁명 당시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다짐[7]으로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민주화 시위를 자초한 요인으로 봐선 이미 글러먹은 듯.
  • 카디피의 경호원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카다피가 유독 여성을 많이 밝히는듯. 고그 밴다이어?[8]#
  • 그의 셋째 아들은 축구광이라 무슨 이유에서인지[9] 허접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까지 진출했는데 우스꽝스런 일화만 남기고 되돌아왔다. 야, 웃기지마
  • 2009년에 집권 후 처음으로 UN 총회에 나타나서 음모론을 1시간 반 넘도록 떠들다 내려갔다. 처음에는 UN 창설 뒤 터진 65차례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을 질타한 데 이어 5개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체제를 신랄하게 까버렸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뜬금없이"UN 본부를 뉴욕에서 리비아로 옮기자."라고 말하더니 본회의장에서 헌장을 찢어서 던져버렸다.(…) 이날 남긴 말만 해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 "신종플루는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제약회사들의 수작이다.",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 배상금으로 7조 7700억 달러를 내놓아라.", "오바마는 아프리카 혈통이니 우리 아들, 영원히 대통령 해먹어야"라는 등의 각종 개드립의 향연이 벌어졌다. 이때 1인당 이십여분으로 제한되어 있는 연설 시간을 무시하고 거진 2시간 동안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국가대표들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사람들이 꽤 나갔다. 문제는 그 후가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순서였다.(…) 이 전후사정을 모르던 네티즌들은 꽤 사람들이 빠진 회의석을 보고UN이 이명박을 싫어한다! 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일부는 이명박이 UN에서 무시당한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기도 하고….
  • 해외 순방할 때마다 유목민 식 천막을 공수해와 넓은 공터에 쳐놓고 지내는 기행도 자주 벌인다. 2009년 당시에는 그렇게 하려다 주변 주민들이 반대 퍼레이드를 벌였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사유지에다 천막을 치고 지내다 돌아갔다.
  • 서구권 시각에서는 패션 센스가 괴악한 것으로도 꽤나 빈축을 산다.위에 여성 경호원 관련 블로그로 가보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 '아프리카의 왕중왕(King of Kings of Africa)'이라고 자칭한다. 

    그것을 비꼬는게 위의 벽화. 아랍어의 내용은 "Monkey of Monkeys of Africa!".
  • 2002년 한국의 모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와서 받은 것은 아니고, 총장이 직접 리비아로 건너가서 줬다. 이유는 카다피가 콩고 분쟁 등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왔고, 1999년 아프리카연합 창설을 주도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민족주의를 제창해 아랍권 통합에 앞장선 공로를 평가했다나.
  • 자신의 이름을 딴 카다피 인권상이 있다. 역대 수상자로는 넬슨 만델라피델 카스트로우고 차베스 등이 있다. 2010년 수상자는 터키 총리 타이이프 에르도안. 아마 터키 구호선이 가자에서 이스라엘군에게 공격받은 일 때문인 듯 하다.
  •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 수상자다.한국 불교계의 흑역사[10]

  • DJ로서의 재능도 탁월한 것 같다. 일명 젱가젱가송. 이스라엘의 음악가 '노이 알루셰'가 만든 영상.[11] '젱가'는 '골목길'[12]을 의미한다 카더라.이거 어째 어떤 필수 요소가 떠오르는데? 이거슨 합필갤의 세계화
  • 북미에서 발매된 NES용 메탈기어에서 아우터 헤븐의 지도자 이름은 '버몬 카타피(Vermon CaTaffy)'(…)
  • 카다피 본인은 자신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 주장(리비아에 가보면 지금이 아프리카의 중심이라며 자기 사진 속에 아프리카 나라들 국기가 크게 배경으로 자리잡은 홍보판이 여기저기 있다고 한다.)하지만 실제로는 아랍권의 분열의 상징이였다. 그가 아랍권을 통합하려고 한 행위는 오히려 독이 되어 아랍권에서도 리비아가 배척되게 만들었다. 사실 위에서 본 카다피의 정신상태라면 저렇게 되는게 당연하지만.
  • 미국 재무부가 처음 카다피의 자산을 동결했을 때에는 미국 내에 약 1억 달러 정도가 예치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조사 결과 297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 동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제재는 미 재무부가 실시한 경제 제재 중 역대 최대 규모이자 리비아 전체 GDP의 절반에 맞먹는 엄청난 액수이다. 천하의 개썅놈 이렇게 많은 액수가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동결될 수 있었던 건 카다피가 특정 은행에만 돈을 몰아서 예금시키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통장 쪼개기와 분산 투자라는 개념을 설명할때 예시로 쓰이겠구나.
  • 이젠 서양에서 테러리스트로 불리기까지 한다.
  • 카다피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던 짓은 비슷하지만 둘이 지옥에서 만나 리턴매치를 벌이게 될 지 여부는 알 수 없다.
  • 시위대의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군대에 비아그라를 지급했다. 이쯤 되면 막장 중의 개막장. 공포심과 폭력으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그야말로 중세 이전에나 있을 법한 원시적인 철권정치를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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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경우 일개 중대장 따위에 불과한 계급이지만 군대 규모가 작은 국가에서는 영관급에 심하면 장성급에 준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남미 같은 경우에는 중사 출신 독재자들도 있다.
[2] 이 부분이 미국과 틀어지고 현재 중동이 석유로 한가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오일쇼크의 가장 큰 이유인 동시에 OPEC의 탄생배경이다. 카다피가 중동권에서 먹어줬었던 이유기도하고. 후세인도 그렇고 카다피도 그렇고 독재자라도 한가닥 능력은 있다.
[3] 당시 헐리우드에서도 백 투 더 퓨쳐에서 리비아가 핵무장을 노리는 테러국가로 나온 바 있다. 뭐 감독인 로버트 저메키스가 열렬 보수파로 알아주긴 하지만.
[4] 죽일 생각이었다면 더 많은 공군을 투입하여 관저까지 확실히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원복조선일보에 90년대에 연재한 시사 만화에선 당시 미국은 150만 달러 이상을 주며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점을 쳐서 그 위치를 폭격했다는 게 군감사에서 드러났다고 엄청 비꼬았다!?
[5] 이 때 데꿀멍한 것이 카다피뿐만이 아니라 잡다 테러조직도 마찬가지였다.
[6] 물론 말로만 사과했을 뿐이다. 이탈리아에서 이에 대하여 반발도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의 땅과 여러가지를 거저 먹고 남은 것들이라 예전처럼 돌려줄 일은 없어보인다.
[7] 하지만 라이베리아나 여러 나라에선 독재자가 소령으로 멈춰선 채로 권력을 차지하던 것도 있다….
[8] 여성들의 충성심이 남성들보다 좋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여성으로 경호원을 조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9] 사실 카다피도 축구광으로 알아준다. 그래서 유벤투스를 완전 인수하려다가 실패했지만 2011년 현재까지도 유벤투스 구단 지분 30%를 바로 카다피가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계에 뭔 떡밥을 던져주었는지 몰라도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에 유벤투스가 참가하면서 바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리기도 했다.
[10] 뭐 이런 경우는 꽤 있다. 베트남의 독재자인 응오딘 지엠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 이승만 정권의 일은 이승만 지지자들이 숨기고 싶은 과거이며, 악랄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반소적 정책을 취핶다는 이유로 샤를 드 골이나 리처드 닉슨이 혁신적인 지도자라고 찬양했던 일도 있다.
[11] 그런데 이스라엘과 원수진 나라들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하긴 사우디 아라비아나 여러 아랍 나라들도 카다피를 질색했으니.
[12] 연설 내용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뒤져서 시위대를 찾아 죽이겠다" 뭐 이런 거였다고….

 

1차 출처 : 엔하위키

2차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bstarten&logNo=80137989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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