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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PD가 말하는 '한예슬과 촬영하기'

by Naya posted Aug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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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약자가 고난을 뚫고 승리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많은 것을 가진 강자가 몰락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한다. 한예슬의 <스파이 명월> 촬영 거부와 방송 펑크는 대중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최고의 가십이 되었다. 그 가십의 배역 성격이 계속 왔다갔다 한다. 한예슬은 부당 노동에 대항하는 약자인가. 그렇게 대중이 감정 이입을 할 때, 대립항인 오만한 강자는 연출 피디가 되었다. 구조의 문제가 아닌 사람 대 사람의 대결로 상징적으로 이해할 때 가십은 가장 파급력이 빠르고 선정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한예슬의 미국행과 현장의 증언까지 이어지자, 오만한 강자의 배역이 한예슬이 되고 현장 제작진이 약자의 배역으로 바뀌었다.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노동권의 문제다, 등등의 정색하고 가십을 사회적으로 평론하는 시각도 줄을 이었다. 배역의 성격이 계속 흔들리면서 지나치게 진지해지자, 대중은 사건 자체를 못난이들의 촌극으로 비웃기 시작했다.

이제 사건이 한예슬의 급 귀국과 난데 없는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싶다'던 투사적 발언, 그리고 그 직후의 '배우가 눈물로 사과하고 피디와 화해했다'는 대단원에 이르면 대중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선정적인 도입부에 비해 지나치게 촌스러운 결말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한 반응은 '재미는 있었는데 오만 정이 떨어진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업계 종사자'로서 이 사건은 폐부를 후려 파는 것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드라마라는 꿈의 공장이 사실은 종사자 모두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지옥도 위에 세워진 것일 뿐일까. 지옥을 만든 주체는 누구인가. '배우와 피디의 갈등'이라는, 가십을 위한 최악의 오독으로 이 사건을 끝내는 이유가 과연 '시청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명분 때문일까?

먼저, '내가 스타'라고 가정을 해보자. 제작사 대표가 내게 접근해 온다. 나와 꼭 일해보고 싶단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 인지도가 있는 날 캐스팅하면 해외 판매 수익을 거둘 수 있어, 투자금을 모으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미 나는 걸어다니는 1인 기업이다. 연기 이외의 방법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경로는 널려 있다. 돈은 나를 보고 모일 터이니, 충분이 몸값을 부풀릴 근거가 된다.

하지만 사실 나도 불안하긴 하다. 이 맘 때쯤 히트작을 내놓지 않으면 서서히 흘러간 스타가 돼 버리고 말 것이다. 드라마는 독이 든 성배라, 전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내 존재감을 한껏 키울 수도 있지만 내 몸값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많은 돈을 받음과 동시에 나의 매력을 가장 많이 드러낼 수 있는 드라마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 중의 하나는 '타이틀 롤'이다. 나의 배역 명이 제목이 되는 작품. 이는 모든 이야기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됨을 뜻한다. 시청자들은 날 보고 울고 웃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위치에 있다. 제작비의 출처, 방송하는 방송사, 연출, 스태프, 그 외 주조연 배우 모두를 대체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은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여기서 '나'의 생각은 배우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소속사의 생각일 수도 있다. 대체로 많은 주연급 스타의 성정은 '아기 같다'. 눈을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환호한다. 아주 사소한 일조차 매니저가 맡아 준다. 거기다가 하는 일은 자신의 매력을 잘 가꿔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다. 내가 감정 표현을 할 때 대중이 자지러진다. 집안에서 '아기'의 역할과 동일하다. 뒤집어 보면, 그 아기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투입되는 지도 상상이 될 것이다. 인내와 고통과 짜증과….

그러나 아기가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면 모든 시름이 날아가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이미 내가 너무나 강렬하게 투사된 생명체 아닌가. 이미 대중의 감정이 강렬하게 씌워진 존재란 말이다. 따라서 스타 배우는 아기와도 같이 너무나 순수하게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고, 대체로 제작진은 이를 배우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주고 소속사가 사회 생활의 역할을 대신 맡아주는 시스템이 수립된다.

또 스타 배우는 의심과 불안에 둘러싸인 존재이기도 하다. 왕비처럼 대우받고 싶다면 왕비처럼 행세하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전달되는 모든 스케줄, 나에게 말을 건네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기준에 따라 재해석된다.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가치는 절하될지 모른다는 불안. 혹시 다른 배우가 내가 모르는 새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이것은 개인적 성정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의 자기 '레벨' 관리 차원에서 스멀스멀 스며드는 생각일 수밖에 없다. 성숙한 배우라면 떨쳐내고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겠지만, 한 번 이런 생각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본인을 비롯한 주변 전체가 악마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이렇게 작품이 시작되고 나면 아무도 스타를 제어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작품의 절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 촬영은 자정부터 개장 시간까지만 허용되는 상황이 있다 가정하자. 그런데 그 주에 나온 대본에 의하면 백화점 장면이 매우 많아서, 삼일간 밤에 촬영해야 하는 형국이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수면 시간을 퍼즐처럼 맞추며 간신히 스케줄을 전달했는데, 주연배우로부터 분노의 항의가 들어온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여기서부터는 배우의 자존심 문제가 된다. 일단 항의를 했으면 뭐라도 바뀌어야지 이게 최선이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제로섬 게임이다.

스태프들의 수면시간이 더 줄고 다른 배우들의 스케줄이 훨씬 지저분하게 찢어지고 전체 촬영 시간도 늘어나서 제작비 지출도 더 많아지는 상황을 만드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주연 배우가 하루를 더 쉬는 스케줄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변동 스케줄을 승인한 감독은 '힘 없고 속 없는 놈'이라는 험담에 시달리게 된다. 어쩌겠는가. 이미 방송은 시작되었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살인적인 스케줄이 나온 이유가 촬영일을 많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촬영일을 많이 잡을 수 없는 이유는, 드라마 촬영은 일수와 시간에 따라 단가가 계산되기 때문이다. 촬영 일수는 그대로 제작비다. 그런데 회당 제작비의 가장 큰 부분을 주연 배우가 가져간다. 제작비는 정해져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을 긴축할 수밖에 없다. 촬영 일수를 줄이는 게 가장 빠르다. 촬영 속도에 대해서만큼은 한국 드라마가 신의 경지다. 그렇게 해도 결과적으로는 스태프 임금 체불이나 다른 배우들의 개런티 축소 등을 통해 스타의 출연료를 맞춰주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적인 우대를 바란다는 것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고혈을 가장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이 더 빨겠다는 소시오패스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배우가 네 시간을 자면 스태프와 감독은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이 급박해지면 감독은 한숨도 자지 못한다. 여기에 배우는 자기 씬만 촬영하면 끝이지만 스태프와 감독은 모든 씬을 촬영하는 주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상은 배우예술이라기보다는 스태프의 예술이다. 연극의 경우,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배우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연극에서 가장 힘겨운 노동자이자,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이자, 사랑을 받는 사람은 온전히 배우다. 그러나 연극은 산업이 되기 힘들고 파급력이 떨어지기에 그 대가를 받지 못한다.

반면 영상물은 피사체를 찍어 그림을 만드는 작업이다. 고급스러운 그림은 그대로 보이지 않는 스태프들의 기술적 노고에 의해 탄생한다. 배우 입장에서 영상물은 연기의 어려움보다는 그 상황에 맞추는 어려움이 더 많은 장르이고, 이끄는대로 맞춰주고 그 영광을 고스란히 가져가면 된다. 배우 황정민의 시상식 소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연출 이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배우는 맛있게 떠먹으면 된다. 밥맛이 없다고 밥상을 뒤엎으면 안 된다. 그런데 뒤엎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 현재의 스타 시스템이다. 견제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스타배우와 연출 간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이 일상적이다. 스타에게는 유일하게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연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출의 권력이 커서가 아니다. 연출은 스타에게 독점되는 현장의 편의를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에게도 공평하게 분배해달라는 기대에 노출된다. 그렇지 않으면 백여 명이 넘는 인력에 대한 리더십이 무너진다.

연출의 리더십은 가장 고민 많이하고 가장 고생 많이 하면서 전체의 목표를 성취해가는 모습에서 생겨나지만, 스타를 대하는 비굴하고 차별적인 모습에서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 아기가 아무리 예쁘게 웃더라도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할 의무와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협업의 매너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는 이토록 고비용 저효율 아기들을 떠안고 사랑하게 되었을까. 스타들은 죄다 미성숙한 바보들인가. 아니면 유독 한예슬 씨만 바보였는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게임의 법칙에 따라 좌충우돌 고민하며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보다 훨씬 시장이 넓은 일본보다도 고비용이라는 한국의 스타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게임의 법칙은 어디에 있는가. 스타시스템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보여지는 방송사와 제작사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규칙을 대강 설명할 수 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818100728&section=04&t1=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