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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6 20:53

5월 27일, 아-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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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장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긴장한 탓이었다. 아니, 분노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만큼 분위기는 무겁고 어두웠다. 1980년 5월21일 밤. 동아일보 편집국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P기자는 안 돼. 흥분을 잘해. 시민들 편에 설 수도 있어! 취재는 안 하고 데모대에 낄지 몰라" "C기자도 곤란해, 먼저 내려간 K랑 경상도 출신만 둘이잖아. 오해 살 수 있어"

 

 

 

5월, 광주에서는...

 

광주 시민군 유혈진압 "대드는 놈 모두 사살" 
1995. 12. 12 [경향신문] 7면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18일 새벽엔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됐다. 오전10시 전남대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처음 충돌했다. 시위대는 시내로 진출했고 오후 1시 공수부대 역시 시내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했다. 그리고 오후3시. 7공수부대가 본격적인 시위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곳곳에서 피가 튀었다. 공수부대는 경찰과 달랐다. 시위대를 죽도록 팼다. 공중에선 헬기 3대가 선회했다. 광주는 이미 시가전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19일엔 11특전여단이 광주에 도착했다. 진압군이 재편성됐다. 오전 9시, 전날 수백 명이 다친데 항의하는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들자 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헬기는 확성기로 시위군중의 해산을 종용했다. 11시부터는 탱크도 등장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제 총검을 사용했다. 체포한 시위대를 거의 발가벗겨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땅에 박게 한 뒤 군화로 짓뭉갰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깠다.

 

이날 오후엔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도 등장했다. 군인들이 육박전을 치르듯 시민들을 밀어붙이자 시민들도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방송국 파출소를 점거 파괴하고 차량에 불도 질렀다. 이날 오후 5시경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는 시체 7~8구가 발견됐다. "비상계엄 철폐"를 외치던 시민들의 데모구호는 이제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로 바뀌었다.


이날부터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인간사냥'이 일상이 되었다. 젊은 남녀들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팬티와 브래지어 정도만 걸친 알몸으로 맞고 깨지고 기합 받는 건 그나마 약과였다. 군인들은 로마 병정처럼 오와 열을 맞춰 시위군중 한 가운데로 들어간 뒤 갑자기 사방으로 산개해 시민들을 잡아 족쳤다. 헬기에선 기총소사를 퍼부었고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했다. 광주시민들은 "이게 정말 대한민국 국군이 맞느냐"며 울부짖었다.


광주역 앞 첫 발포…5.18 상황 재구성
1995. 7. 19 [동아일보] 7면

 

 

 

기자가 파견돼도 현장보도를 할 수 없었던 현실

 

광주 시위 발단과 전개
1995. 12. 10 [경향신문] 7면


21일 광주에 내려 보낼 특별취재반을 인선하던 사회부장은 정말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자신이 광주출신인 부장은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마자 사건기자 한명을 광주에 특파했다. 무서운 감이었다. 계엄확대를 통한 정치일정의 중단, 김대중 씨 체포 등을 예견하고 그렇다면 광주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 것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는 5월18일, 전날 밤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히 취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계엄군 측이 광주에서 벌어진 사태를 일절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엄사령부는 20일까지 광주의 '광'자도 신문방송에 나오지 않도록 옥죄고 있었다. 그러던 21일 아침, 계엄사는 "광주 유혈사태" 사실을 처음 발표했다. 외신보도와 알음알음 소문이 번지는 것을 더 이상 막기 어려운 때문이었다. 대신 과격시위의 원인인 공수부대의 '인간사냥'은 쑥 감췄다. 군인과 경찰 5명이 숨지고 30명이 부상했으나 민간인은 1명만 숨졌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발표였다.

 

게다가 시위의 성격을 "학원소요 주동자, 깡패, 고정간첩 등이 잠입해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해" 일어난 것으로 규정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밟아 죽인다."거나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으로 아들딸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차게 해서 장난질을 한다."는 유언비어를 불순분자들이 퍼트리는 바람에 시민들이 흥분했다는 것이었다. 평화시위를 과잉 진압해 유혈사태가 난 것을 거꾸로 군경이 피해자인 양 호도한 것이다.

 

 

 

'진실호도' 계엄사령부의 발표문 보도를 둘러싼 논란

 

광주 일원 소요 (당시 보도이며 캐스트의 논지와는 무관)
1980. 5. 21 [경향신문] 1면


광주 일원 대모 사태 (당시 보도이며 캐스트의 논지와는 무관)
1980. 5. 21 [동아일보] 1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진실가리기였다. 그날 동아일보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을 보도하지 않았다. 대신 '광주일원 데모사태'라는 3단 제목 아래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단 한 줄짜리 기사만을 실었다. 발표문을 그대로 실어 사태를 호도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몇몇 신문은 달랐다. 계엄사 발표문을 전문 게재하고 시민들을 폭도인 양 몰아붙였다. 광화문 등지 가판소년들은 계엄사 발표문에 빨간색연필 도배를 한 뒤 "광주일대 데모 격화요!" "군경 5명 사망, 지역감정 유언비어 난무!" 등을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딱 한 줄, 그것도 별 내용 없는 사실 적시 기사에 눈 돌리는 독자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 몇 만 부가 팔리던 동아일보 가판은 그날 몇 백 부도 나가지 않았다.


동아일보엔 항의전화도 빗발쳤다. 대부분은 "군의 엉터리 발표문을 기자 양심상 도저히 보도할 수 없었다."는 사정을 이해한다며 오히려 격려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호도하는 발표라 하더라도 역사의 기록 차원에서 신문에 실어야 했다"거나 "계엄사 발표문을 고스란히 믿지는 않더라도 그걸 보며 사태의 심각성은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항의했다. 사태를 전혀 파악할 수 없게 한 '단견'이라는 것이었다.

사회부장이 바로 그런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계엄사 발표대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수도 없고, 그러자니 실상의 끄트머리마저 보도를 못하게 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사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특히 가판판매가 완패했다는 소식 탓에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계엄사 발표가 있었던 바로 그날 오후 군은 본격적으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체를 손수레에 싣고 항의시위를 계속했다.

 

 

 

진실을 기록해두기 위한 '기자 현장 파견'

 

그날 저녁 사회부장은 부 전체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엄숙하게 선언했다. "계엄사 발표문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어서 보도를 안 했지만 회사 내외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앞으로 비슷한 일은 또 생길 것이다. 광주의 실상을 명확히 취재해 놓았다가 통제가 풀렸을 때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 누가 광주에 가서 취재하겠는가?" 기자들 거의 다가 손을 들었다. 그날 젊은 기자 두 명이 선발돼 광주로 급파됐다.


이미 광주로 들어가고 나오는 교통편과 통신선이 모두 끊긴 상태였다. 경찰 비상선과 철도 전화가 일부 통했으나 그것도 곧 완전 두절됐다. 파견기자들은 광주 외곽에서부터 걸어서 시내로 들어갔다. 취재한 내용을 송고는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광주 파견에서 제외된 서울기자들 역시 조금이라도 현지상황을 알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귀동냥 취재를 해 회사의 '정보보고 철'에 기록해 두었다.


'5월 광주' 취재수첩을 꺼낸다
1997. 5. 13 [동아일보] 29면

 

그때 사회부장은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초 광주지역 일간지 발행인이 되었다. 엄혹한 5.18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지 못한 한에 젖었던 그는 한국기자협회, 5.18 시민연대 모임과 함께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항쟁 취재수첩을 찾아내 '5.18특파원 리포트'란 한 권의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사람들은 5월27일 새벽 항쟁의 마지막 날, 시민군은 어떻게 최후를 맞았고 진압군은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생생한 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5월 27일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날에는..

 

뉴욕타임스 기자는 캄캄한 여관방에서 겪은 27일 새벽 상황을 증언했다. "어둠 속에서 들린 그 지독한 비명소리, 따-따-따 하는 자동화기 소리. 거기 섞여 자그맣게 들리는, 아이들이 파티에서 터뜨리는 폭죽소리 비슷한 따다닥 소리. 나는 이 소리들을 학생들이 카빈총을 쏘는 소리로 간주했다. 카빈총으로 정규군 부대와 맞선다니…" "그리고 간간이 엄청나게 큰 '쉬웅' 소리. 로켓포를 발사하는 소리였을까,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였을까?" "200m 거리에 있던 내게는 비명소리, 고함소리, 투항을 촉구하는 외침소리 등 도청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던가."

 

1980년 5월 "악몽의 10일" 비록 첫 공개
1988. 5. 17 [경향신문] 11면


부산일보 기자의 증언도 생생하다. "(27일 오전) 전남도청 안마당은 계엄군 병사들이 시민군 시체를 치우느라 한창이었다. …도청 정문 안 시멘트 바닥에는 방치돼 있어 시체거니 하고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사람 6명이 있었다. 전깃줄로 두 팔을 뒤로 돌려 묶고 발목을 이 줄로 함께 묶은 뒤 다시 목까지 칭칭 동여매 두었다" "하사관 한 명과 병사 두 명이 나타나 …'이 새끼 아직 숨이 붙어 있구나.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죽여줄 테니까'. 구둣발로 짓이기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두들기는데 금방 피투성이가 돼 얼굴이 푹 꼬꾸라졌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을 짓밟아 죽이려 드는 것이었다."


"헬리콥터가 도청 앞 광장에 내려앉았다. 국방장관과 그를 수행한 장군들이 내렸다. 장군들의 얼굴표정은 개선장군의 바로 그것이었다. 두 팔을 양 허리에 턱 걸친 채 싱긋이 웃으면서 …이 자랑스러운 장면을 소리쳐 널리 알리지 못해 안달이나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더 있어본들 마음만 괴로울 뿐이었다. 시민군들의 시체 치우는 장면이나 포승줄에 묶여 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모습밖에 더 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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