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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어온 거라 잘 나올지 모르겠네요
4개월,3주...그리고 2일 이라는 영화입니다.(20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 영화는 루마니아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그러니까 소급하자면 1987년이겠지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시절의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대생 가비타와
그녀의 낙태를 도와주려는 친구 오틸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차우세스쿠 정권 아래 미혼모 여대생이라- 훌륭한 시작입니다.
이 당시 루마니아 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흔해빠진 기치 아래 역사상 어느 정부도 시도한 적 없는
극단적 실험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한 출산율 장려 실험이었죠.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시켰고 중절수술을 한 의사,
산모 모두 잡히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콘돔, 피임약 등 피임기구들도 모두 국가에서 몰수,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수 년만에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가임기 여성 대부분은 임신하는
족족 아이를 출산해야 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잠깐만 더 당시 루마니아의 상황을
언급하겠습니다. 차우세스쿠 정권은 국고를
늘리기 위해 또다른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수출을 늘리는 것이었죠.
그런데 7-80년대 루마니아가 뭐 별달리 수출할 품목이 있었겠습니까?
정부는 식량을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구부양 정책을 실시하는 와중에 식량을 수출하다니
뭐 그런 병신같은 국가정책이 다 있냐 싶겠지만
80년대 루마니아는 진짜로 그런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밖에도 멍청한 정치가는 얼마든지 있었던 겁니다.
인구는 극적으로 늘어났지만 나라 안 식량은
모조리 수출하고 있었으니 극심한 기아와 빈곤이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임기 여성을 보호해주는
제도적 장치는 아무 것도 없었고
여성은 그들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영화 초반, 주인공 오틸리아가 여학생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잠깐 이런 실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옵니다. 오틸리아의 친구들이 기숙사 내에서
암시장을 열고서 생필품과 여성용품,
더불어 피임약을 구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죠.
가비타와 오틸리아는 바로 이런 여성들만의 네트워크에 의존해서
불법 낙태시술 의사도 소개받았습니다.
또 오틸리아가 남자친구인 아디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장면에서는, 식량정책 때문에 고통받는 루마니아의
경제적 상황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와 출산은 이 영화를 풀어나가는 두 개의 강력한 단서입니다.
저는 여기서 더 이상 구구절절히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며
여러분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가비타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가비타의 모습에서 극단적 뻔뻔함을
읽어낸 것 같습니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은 무책임함과
무기력함의 집합체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한 것은 가비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가장 큰 폭력을 당했던 것도 가비타였죠.
도살자같은 돌팔이 의사가 동정심도 없이 두 여인을 몰아세웠을 때,
칼날은 일차적으로 가비타를 향해 있었고
그녀는 고스란히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중절수술 자체도 얼마나 자비심 없이 행해졌나요.
틀림없이 한 번 이상은 사용했을 수술도구들을, 제대로 세척하지도 않고
알코올로 한번 스윽 닦아내는 의사의 손놀림을 보고
저는 두려워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무리 불법이니 모든 걸 여성이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도,
저렇게 감염의 위험조차 고려하지 않고 수술을 행해도 되는 것일까?
가비타는 과연 저 수술을 받고 나서도 그 몸이 그대로 온전할 수 있을까?
다시 임신할 수 있을까?
여성으로서의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4개월하고도 3주나 되었다는 그녀의 상황 자체도 그것을
보고 있는 저를 끔찍하게 고문했습니다.
임신 5개월째가 가까워지면 이미 태아가 많이 자란 상태이므로,
이때 중절수술을 하는 것은 산모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가비타는 자신의 목숨을 모두 걸고서
중절수술을 택한 것이었지요.
실제로,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자그마치 50만명의 여성이 불법 낙태시술 중 죽었습니다.
의사들은 낙태시술을 행하다 적발되면 실형을 선고받았기에
아무도 중절수술을 하려 하지 않았고,
제때 수술을 받을 수 없어 절망한 여성들은
스스로 낙태를 하기 위해 자궁을 바늘로 찌르다가
출혈과다로 실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려간 여성 앞에는 의사가 아니라 경찰이 들이닥쳤고,
경찰들은 죽어가는 그녀들을 심문해서 의사가 누구인지
실토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었죠.
그것이 당시 루마니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비타가 그 50만명의 숫자 중 하나가 되는 건 아닐까,
제가 그 장면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지
당신도 짐작이 가시지 않나요.
그래요. 저는 가비타가 그렇게까지 밉지는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미워한 인물은
영화 속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미워한 건 가비타를 임신시킨 남자였어요.
그가 옆에만 있었어도 오틸리아나 가비타가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었겠죠.
그러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삭제합니다.
그럼 오틸리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이 영화의 타큐멘터리적 사실성과 웅변적인 아름다움은
영화 속 화자를 가비타가 아니라 오틸리아로 설정함으로써 흭득됩니다.
임신 당사자인 가비타로부터 살짝 벗어난 인물이
이 영화를 이끌어감으로써 관객에게는 적절한 거리두기가
가능해지는 동시에 괴로운 경험에 심정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여지도 더 늘어났거든요.
그런데 오틸리아는 대체 왜 자신의 일도 아닌데
헌신적으로 가비타를 도울까요?
선량한 사마리아 인이라서?
천만에. 그녀는 가비타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오틸리아는 가난한 고학생이고, 그 돈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아니, 이번에 가비타가 수술하지 않으면 가비타는 다음번에도
틀림없이 오틸리아에게 돈을 빌릴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여지없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주어야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결국 모든 사람들은 이기적 동기에서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 같아 암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해당사자라는 단어는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비타는 오틸리아의 기숙사 룸메이트입니다.
멀리 떨어진 부모나, 때때로 만나는 남친보다도
더 가깝고 직접적인 존재이지요.
가비타가 잠 못이룰 때는 함께 잠 못이루게 될 사람은 바로 오틸리아이고,
평행우주에서, 결국 낙태를 못해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면
기숙사 침대에서 그 아이를 두 손에 받아들 사람은
바로 오틸리아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오틸리아 역시 가임기 미혼 여성이라는
그물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오틸리아도 가비타의 도움이 필요할 지 모르지요.
누군들 그 사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그늘로부터조차도 독립하지 못하고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남자친구 아디에게 짜증내면서,
오틸리아는 만약 자신에게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할거냐고 묻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미적지근하게 말하는
아디(낙태하는여자남자친구)에게, 오틸리아는 매섭게 쏘아붙이지요.
“나를 도와줄 사람은 가비타 뿐이야.”
사회의 상부구조를 떠받치기 위한 모든 압력이
그들에게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존재는,
결국엔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 뿐이라는 것을 오틸리아도
가비타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왜 오틸리아는 그토록 사랑스러운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임신중절부터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왜 가비타는 자신의 몸까지 헤쳐가면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걸까요?
키워드는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삼엄한 감시와 죽은 경제, 가스가 나오는 동안에만 재빨리 구워야했던 케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루한 구세대,
아이는 여자가 키워야지, 저 아이도 어렸을 때
참 키우기 힘들었지요,그런 어른으로부터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는 청년.
임신한다는 건 그런 청년과 결혼한다는 것이고
그런 청년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런 어른들의
체제 속에 포섭된다는 뜻이겠지요. 아디가 결혼하려면 결혼 자금은
부모에게 빌려야 할테니까요. 그가 부모의 도움 없이
자립하기란 요원해보입니다.
오틸리아가 독립을 유지하지 않으면,
죽도록 노력하며 돈을 긁어모아 대학을 다닌 것도,
공학을 공부한 것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애초에 대학을 나온다 하더라도 그녀가 갈 곳은 없습니다.
사회는 그녀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궁만 필요로 하니까요.
먹기 싫은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온 길에 오틸리아는
길 구석에서 구토하고 맙니다.
어째서 섹스와 임신(두 개는 결코 떨어질 수 없죠)
이 개인의 비밀스럽고 감춰야만 할 은밀한 영역이 되어야 합니까?
다음 세대를 탄생시키는 일은 공동체 전체가 수행해야 될 문제입니다.
섹스를 입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도록 꽉 잠그고 있는
억압된 사회는 개인에게 엄청난 폭압을 가하는 것이고,
임신을 단지 여자의 사적인 일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회구조는 개인을 말살시킵니다.
임신은 자궁을 가진 존재만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아닌 것이니,
그것을 기계적 환원주의로 이해하려는
사회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성관계를 맺게 되면 성관계는 지극히 당연하게 따라온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임이나 임신,
다음 세대를 창조하는 일들은 개인의(좀 더 냉정히 말하자면 여성의)
사적 영역 속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되는 일이고 공론화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도 속에 포섭되지 않은 채로
임신한 여성은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하지요.
그것은 80년대의 루마니아든 21세기의 한국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분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신한 10대 여성이 발각될 경우 학교에서
쫓겨난다는 걸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인구수를
부양하기 위한 가장 쉬운 정책은
‘여성이 아이를 낳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습니다.
거기 자궁이 있으니 수정시켜라.
아주 쉬운 해결책이죠.
여성고용을 확대하거나,
평균임금의 2/3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임금을 개선하거나,
출산 후 재고용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확인하거나,
탁아소나 유치원을 늘리는 등의 사회적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젊은 여성들의 개념론을 탁상공론하거나
여성이 셋째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 알량한 보조금을 보태준다는 발상은
사회 인프라 개선보다도 여성임신이 훨씬 쉬운 해결책이라는
안이한 행정편의적 발상에서 나온 정책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음 세대를 마음껏 부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에는 섹스조차 한 개인이 감당하기
쉬운 무게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 그러나 영화는 페이드 아웃 됐어도 제 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죠.
그리고 영화는 또, 한 개인의 잘못된 선택보다도
한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얼마나 더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것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난자를 제공한 여성에게 무궁화를 달아주는 사회,
과일이나 작물처럼 인간도 재배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20대의 힘없는 여성은 그래서 이 영화가 몹시 무섭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