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한글의 역사

by 모아레 posted Feb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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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토의 크기로 볼 때는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인구 수로 볼 때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북한이 합치면 약 7천만으로 15위에 해당한다. 언어를 중심으로 볼 때 한국은 더욱 크다.

  한국어는 지구상에 쓰이고 있는 수천 가지 언어 중에서 중국어,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벵골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등에 이어 사용 인구 수로 열세 번째를 차지하는 언어이다. 이러한 한국어에 대해 우리는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지구상의 소수 언어가 자꾸 소멸해 간다는 보고가 있고 그래서 앞으로 몇 언어만 살아남을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전망에 기대어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하고 심지어 우리의 후손들은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은 아니며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민족언어를 특징으로 한다. 고유 언어를 잃은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라 하기 어렵다. 예컨대 만주족은 만주어를 잃어버림으로써 사실상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우리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역경을 헤치고 민족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말과 글을 잘 보존하고 지켜 나감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외국인과 외국어에 대한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지 않도록 외국어와 외국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세계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겠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문자들을 분류해 보면, 우선 표의 문자표음 문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표의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일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로서, 한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에 표음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갖지는 않고, 대신 일정한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내에서, 의미를 갖는 단위(형태소나 단어)는 수만 내지 수십만 개나 되기 때문에, 표의 문자는 글자의 개수가 매우 많아지게 된다. 반면에 하나의 언어에서 서로 구분되는 소리는 수십 개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표음 문자는 수십 개만 있으면 하나의 언어를 무리 없이 나타낼 수 있다. 표의 문자도 나름대로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필요한 개념이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표의 문자는 이들 개념에 해당하는 문자를 하나하나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문자 체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이 소요된다. 또한 글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이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노력도 엄청나다. 문자의 발달 역사에서 처음에는 표의 문자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그것이 표음 문자로 발달하는 일이 많이 있다. 표의 문자에 비해 표음 문자가 더 진화된 문자 체계인 것이다.

  표음 문자는 다시 음절 문자음소 문자로 구분할 수 있다. ‘간’이라는 음절은 자음 ‘ㄱ’과 모음 ‘ㅏ’와 자음 ‘ㄴ’의 세 음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절 문자는 하나의 글자가 ‘간’ 같은 음절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고, 음소 문자는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자음이나 모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내에서 음소의 수는 수십 개이지만, 음절의 수는 수백 내지 수천 개나 된다. 따라서 음절 문자는 음소 문자에 비해 글자의 수가 많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음절 문자보다는 음소 문자를 더 발달된 체계로 본다. 다만, 가능한 음절의 수가 많지 않은 언어에서는 음절 문자를 사용해도 큰 불편이 없을 수 있다. 일본어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분류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글을 보면, 한글은 가장 발달된 체계인 음소 문자에 속한다. 그런데 한글은 음소 문자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각각의 글자들이 원자적(原子的)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내적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ㅋ’이나 ‘ㄲ’은 원자적인 하나의 낱글자라고만 볼 수 없고, ‘ㄱ’과 거기에 추가된 하나의 획, 그리고 두 개의 ‘ㄱ’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한글이 지닌 이러한 체계성을 중시하여, 한글을 단순히 음소 문자로 보지 않고 자질 문자(featural writing system)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서 거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자질 문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여러 문자 체계들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고도의 체계이다. 그리고 이 범주에 드는 문자는 아직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 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앞에서 보여 준 선조 임금의 한글 교서 같은 글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 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 계층이었을 텐데, 아마도 자기 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이 또한 한글 사용의 확대에 있어서 여성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 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고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 찍어 내는 일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소설을 탐독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통한 고문이 아니라 백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 소설, 통속 소설들이 많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이것이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소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한글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많이 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질 때, 세종은 이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정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데 사용할 바른 소리(글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의 양반 사대부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의 출현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한자와 한문에 비해 한글을 낮잡아 보는 태도가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한자/한문은 ‘진서(眞書)’라고 부르고 한글은 ‘언문(諺文)’이라고 흔히 불렀다. 그리고 한글을 주로 부녀자들이 사용했다고 해서 ‘암클’이라고 불렀다거나 아직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고 해서 ‘아햇글’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암클’이나 ‘아햇글’ 같은 명칭이 역사 기록에 분명히 남아 있지 않아 실제로 쓰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개화기에 이르러 민족정신에 대한 각성이 일어남에 따라 우리 민족 고유의 문자인 한글의 가치도 높이 평가하게 되어 ‘정음(正音)’, ‘국문(國文)’ 등의 명칭도 많이 사용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서 사용한 사람은 주시경인 듯하다. 주시경은 개화기에 우리 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에 힘쓴 사람인데, ‘한나라글, 한나라말, 한말’ 등의 용어도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며, ‘배달말글 몯음’이나 ‘조선어 강습원’을 ‘한글모’, ‘한글배곧’으로 개명하기도 하고, 어린이 잡지 ‘아이들보이’(1913. 9.)에 ‘한글풀이’란을 넣기도 하였다. 그 후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한글날이 오늘날과 같이 10월 9일로 정해지게 된 데에도 곡절이 많았다. 세종은 한글을 만드는 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실록에도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왕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은 날짜를 정확히 명시해서 기록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1443년(세종 25) 12월 조의 맨 끝에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그냥 ‘이번 달에 왕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3년 뒤인 1446년(세종 28) 9월 조의 맨 끝에 역시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이번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는 기록이 나온다.

   이 두 기록을 놓고서 현대의 학자들은 약간의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거기에 문제점이 많아서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3년 동안 해서 1446년 9월에 한글을 제대로 완성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고, 그렇다면 1443년 12월보다는 1446년 9월을,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록에 9월 며칠인지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9월 그믐날로 가정하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실록의 1446년 9월 조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책(소위 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실록의 1446년 9월 조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였던 학자들은 한편으로 민망하긴 했지만,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으니 이 때를 한글날로 정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하였다. 그래서 10월 29일이 한글날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실록의 1446년 9월 조 기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고가 완성된 것을 세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당시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책이 간행되어 신하들에게 하사되기까지는 통상 몇 달 이상 걸린다. 따라서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 ‘훈민정음 반포도’라는 그림까지 그려서 걸어 놓은 곳도 있는데, 당시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어떤 공식 행사를 열었다는 기록도 없다. 요컨대 한글날이 10월 29일로 정해졌던 것은 학자들의 사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웃지 못할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본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정인지의 서문에 ‘세종 28년 9월 상순’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역시 정확한 날짜는 아니나 애초에 9월 그믐으로 잡았던 것에서 20일 정도 앞당길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10월 29일에서 20일을 앞당겨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한글날이 정해지게 된 경위는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고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으나, 세종이 한글을 만든 취지와 한글의 과학성을 온 국민이 되새겨 볼 기념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어느 언어학자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가 만들어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연다고 한다. 한글이라는 좋은 문자가 지금 나의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글날이 아니라도 가끔씩은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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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는 국립국어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