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해석기하학의 탄생

by 모아레 posted Apr 2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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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Opening Ment)

  우리가 중등학교때 배운 점과 좌표와의 관계나 좌표를 xy-평면상에 하나 하나 좌표를 표시하고 표시된 점들을 연결하여 그래프를 완성하는 내용의 수업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해석기하학을 처음으로 접해보았으나 해석기하학이란 학문으로는 생각지 못하였다. 고대로부터 대수학과 기하학이 서로 다른 학문으로 발전하다가 기하학을 대수학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대수를 기하로 해석하면서 그 두 학문사이의 방법으로 해석기하학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해석 기하학의 주된 사고방법은 '변환-풀이-반전 기법(transform-solve-invert technique)' 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이 사고방법이란 영어문제를 풀 때 영문을 한글로 이해하여 [변환], 한글 내용을 풀이된 문제를 해결하고 [풀이], 이를 대시 영문으로 바꾸어 기술한다 [반전] 는 문제해결 방법이다.

 

 

1. 해석기하학이란

   

   평면 기하학에 적용하면, 실수의 순서쌍과 평면의 점 사이의 대응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면의 곡선과 두 개의 변수를 가진 방정식의 대응을 가능하게 해서, 평면의 각 곡선은 명확한 방정식 f(x, y)=0으로 표시되고, 그와 같은 각 방정식에는 평면의 어떤 곡선이나 점들의 집합이 대응한다. 방정식 f(x,y)=0의 대수적이고 해석적인 성질과 그에 대응하는 곡선의 기하학적인 성질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대응이 성립한다. 기하학의 정리를 증명하는 작업은 대수학이나 해석학에서 그에 대응하는 정리로 교묘하게 이전되었다. 그리고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에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결과들을 발견해내는 데 많이 적용되었다.

 

 

 

2. 해석 기하학의 발견

 

   1) 고대

      적당한 좌표를 사용해서 점의 위치를 정하는 개념은 고대 이집트와 로마에서 측량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지도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2) 아폴로니우스의 원뿔 곡선

      해석기하학이 좌표의 사용뿐 아니라 좌표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하학적 해석을 포함한 것이 아폴로니오스의 원뿔곡선이다. 이는 대부분의 기하학을 이 곡선들의 어떤 좌표 방정식에 대한 기하학적 동치 관계(이 개념은 기원전 350년경의 메나이크모스가 발견한 것으로 여겨진다)로부터 유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에서 강하게 선호되었다.

 

   3) 오렘(Nicole Oreame; 1323 ∼ 1382)

      그의 논문중 작은 변화만이 허락된 독립 변수에 대응하는 종속 변수를 그래프로 나타냄으로써 어떤 법칙들을 제시하여 해석기하학의 다른 면을 예시하였다. 그의 논문들에서 직선에 대한 방정식의 최초의 명확한 도입과 이차원 공간에서 삼차원으로 그리고 사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에 대한 일부개념들의 최초의 도입과 같은 그의 업적을 꼽는다.

 

  4) 앞의 해석기하학에 대한 견해들은 그것을 혼돈 시킬 우려가 있다. 해석기하학의 진정한 본질은 기하학적인 고찰을 그에 대응하는 대수적인 고찰로 바꾸어 놓는 데 있다. 해석기하학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대수적 처리 과정과 기호가 발전되고 난 후이다. 따라서 프랑스 수학자 데카르트와 페르마에 의한 17세기의 수학에 대한 결정적인 공헌이 해석기하학의 본질적인 창시라고 생각하는 대다수 역사가들의 견해를 따르는 편이 보다 옳을 듯하다. 분명히 이 두사람이 그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은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해석기하학이 탄생되었다.

 

 

3. 데카르트와 페르마

 

  1) 데카르트(Rene Descrtes; 1596 ∼ 1650)

 

     가. 탄생

데카르트는 1596년 투르(Tours) 근교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라 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1612년 그는 학교를 떠나 곧장 파리로 가서 메르센과 미도르주와 더불어 얼마간 수학연구에 전념했다. 당시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네덜란드로 이주 거기서 20년간 살면서 철학, 수학, 과학에 몰두했으며,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를 받고 마지못해 스웨덴으로 갔다. 몇 개월 후 폐렴에 감염되어 1650년 초에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 저술

천체론(Le monde),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t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과학에서 올바르게 이성을 이끌고 진리를 찾는 방법에 대한 강연)

 

         ●. 천체론

             우주에 대한 물리적 설명서인 <천체론>을 4년에 걸쳐 집필하였으나, 교회측이 갈릴레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신중히 고려한 끝에 포기하고 미완성인 체로 놔두었다.

 

         ●. 방법서설(方法序說)

             모든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문으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부록을 달고 있다. 1637년 에 출간되었으며, 해석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공헌은 이 세 부록 중 마지막 권에 나타나 있다.  

 

             -. 마지막 부록 기하학(la geometrie)에 대하여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며, 세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 1권 : 대수적 기하학의 약간의 이론을 설명하고, 전 그리스 시대에서의 발전상을 그리고 있다.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을 이용하면 일반적인 경우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과 제 1권의 저술로 그는 해석기하학을 고안하도록 고무시킨 문제를 접하게 된다.

                ○. 제 2권 : 현재는 쓰이지 않는 곡선의 분류와 곡선의 접선을 작도하는 흥미있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 제 3권 : 2차 이상의 방정식의 해법에 관한 것이다. 다항식의 양근의 개수와 음근의 개수 에 관한 한계를 결정하는 소위 데카르트의 부호법칙(descartes' rule of signs)이라 불리는 법칙이 나온다. <기하학>에서 테카르트는 알파벳의 앞쪽의 글자들은 알려진 양을 나타내고, 뒤쪽의 글자들은 미지수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것을 관습화시켰다. 그는 또한 지수를 나타내는 비에트의 방법보다 훨씬 개량된 현재의 지수체계를 소개하 고, 한문자는 양이든 음이든 어떤 양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미정계수법을 최초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기하학>은 어떤 의미에서 해석적 방법의 체계적인 발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어떤 독립적인 설명을 붙여 그 방법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책에 32가지의 그림이 있지만 명백히 밝혀진 좌표축은 어느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100년후 오늘날 대학 교재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형태를 가진 좌표(coordinate), 횡좌표(abscissa), 종좌표(drdinate)란 말은 1692년 라이프니츠의 업적으로 오늘날 해석기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다.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몇몇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 그중 하나는 꿈에서 나타났는데 1616년 11월 10일 성 마틴 이브에 다뉴브 강둑 위에 있는 군대의 겨울막사에서 야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그가 말하는 기이하고 생생하며 조리 있는 몇 편의 꿈을 꾸었다. 그 꿈들이 인생에 있어서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을 밝히는데 그의 미래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해 주었고 그것이 해석기하학 또는 대수학의 기하학에의 응용,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방법의 기하학에의 적용으로 발전하였고 그의 착상의 일부를 <방법서설>에 상술했다.

○. 다른 이야기는,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 이야기와 같이, 데카르트가 천장을 기어 다니는 파리를 보고 해석기하학에 대한 착상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파리의 경로는 인접한 두 벽으로부터 파리까지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만 알면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는 것이다.

      라. 그밖의 이야기

 

         데카르트가 기여한 다른 수학적 항목 중 볼록다면체의 꼭지점의 수를 v, 모서리의 수를 e, 면의 수를 f라 할 때 관계식 v - e + f = 2와 흡사한 발견이 있다. 그는 데카르트의 엽선(folium of descartes)이라 불리는, 오늘날 많은 미적분학 교재에서 볼 수 있는 결절점을 가지는 3 차 곡선을 처음으로 연구하였으나 완전하게 그리지 못하였다. 동시에 고차의 포물선을 고찰하고, 사이클로이드의 접선을 매우 깔끔하게 작도하였다.  

 

 

  2) 페 르 마(Pierre de Fermat; 1601?∼1665)

 

     가. 탄생

 

   1601년 8월 17일 툴루즈 근교의 로망에서 태어났다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그는 1665년 1월 12일 카스트레 또는 툴루즈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죽 상인의 아들이었고 초기 교육은 가정에서 받았다. 30세 때 툴루즈 지방의회의 의원직을 얻어 겸손하고 꼼꼼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다. 소박한 은퇴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동안 많은 여가 시간을 수학연구에 바쳤다. 비록 생애 동안 거의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많은 뛰어난 수학자들과 과학적 교류를 가졌고, 이렇게 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중요한 공헌을 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에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라고 불리고 있다.

 

 

     나. 근대 해석기하학의 기초 구축

 

   데카르트가 근대 해석기하학의 기초를 구축하고 있는 바로 그때, 프랑스의 또 다른 수학 천제인 페르마 역시 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페르마가 앞섰다는 증거는 1636년 9월에 포베르발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 있는데, 착상을 한 지 7년이나 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 연구의 자세한 내용은 그가 죽은 후 발표된 논문 <평면 및 입체궤적 입문, Isogoge ad locus planos et solidos>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직선과 원의 방정식과 쌍곡선, 타원, 포물선에 관한 고찰을 볼 수 있다. 1637년 이전에 완성된 접선과 구적법에 관한 논문에서 페르마는 많은 새로운 곡선을 해석적으로 정의했다. 데카르트는 역학적 운동에 의해 몇몇 새로운 곡선을 제시한 반면, 페르마는 대수적 방정식에 의해 정의된 많은 새로운 곡선을 제안했다. 곡선는 지금까지도 페르마의 쌍곡선, 포물선, 나선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데카르트는 대부분 자취로 시작하여 그것의 방정식을 발견한 반면에, 페르마는 방정식으로 사작하여 그것의 자취를 연구하였다. 이것은 해석기하학의 근본 원리의 상반된 면이다.

 

 

     다. 수학에 대한 공헌에 관하여

 

   페르마의 수학에 대한 다양한 공헌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현대 정수론을 만든 것이다.  페르마가 정수론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동기는 아마도 메지리악(Bacher de Meziriac)이 1621년 펴낸 디오판투스의 <산학; Arithmetica>의 라틴어 번역판을 본 것이었을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한 페르마의 많은 업적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이 번역판의 여백에 쓰여진 각주에 나타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5년 후인 1670년에 아들 클레망-사무엘(Clement-Samuel)이 이러한 각주들을 삽입하여, <산학>의 새로운 판을 발간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매우 조잡하게 인쇄되었다.  페르마가 발표한 많은 미증명 정리들이 후에 옳은 것으로 발혀지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면 페르마의 연구 내용을 알 수 있다.

 

 

         ●. 페르마의 정리

 

         1. P가 소수이고 a 와 p 가 서로 소이면 은 p로 나누어 진다.

               예)

 

         2. 모든 홀수의 소수는 두 제곱수의 차로서 일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증)

            이면 이고 p가 소수이므로 p의 약수는 p                    와 1뿐이다. 따라서 이고, 또는

                 이다.

 

          3. 형태의 소수는 두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

          이 정리는 1640년 12월 25일 메르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 1754년 오일러가 이 표현이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4. 형태의 소수는 정수인 변을 가지는 직각 삼각형의 빗변이 단지

                한 번, 그의 제곱은 두 번, 세제곱은 세 번 등등이 된다.

                예) 을 살펴보면,

                   

 

          5. 음 아닌 정수는 네 개 이하의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 1770년 라그랑주가 증명하였다.

 

          6. 정수인 변을 가지는 직각삼각형의 넓이는 제곱수가 될 수 없다.

                => 라그랑주가 증명

 

          7. 방정식 의 정수해는 단 하나이고, 의 정수해는

                단 두 개다.

          => 첫 번째 식의 해는 (5, 3)이고 두번째 식 해는 (2, 2)와 (11, 5) 이다.

 

          8. 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9. 일 때 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Fermat's last theorem>

 

  페르마는 이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디오판투스의 번역판 2 권의 8 번 문제 옆 여백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주어진 제곱수를 두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것과 세제곱수를 두 세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것, 일반적으로 4이상 어떤 차의 수를 동일한 차의 두 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것 중 후자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이것의 감탄할 만한 증명을 틀림없이 하였지만 여백이 너무 좁아서 여기에 쓸 수 없다."

  n=4인 경우는 페르마가 다른 곳에서 증명하였고, n=3인 경우는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1825년경에 르장드르와 디리클레가 n=5인 경우의 증명을 독립적으로 하고 1839년에는 라메(Lame)가 n=7인 경우를 증명하였다.

  1843년 독일 수학자 쿠머(E.Kummer, 1810-1893)가 그 증명을 디리클레에게 제출했는데, 디리클레는 추론과정의 하나의 실수를 지적하였고 쿠머가 다시 그 문제에 집착하여 대수학에 관련된 중요한 이데알 이론이 발달된 수 년후, 페르마의 관계식이 해를 갖지 않기 위한 매우 일반적인 조건을 이끌어냈다.  

  300년간 여러 수학자들이 이정리의 증명에 도전하였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실제로 증명된 것은 극히 최근, 1994년에 증명되었다.

 

         10. 페르마는 임의의 음 아닌 정수 n에 대하여 이 소수라고

            추측했다. 이것인 오일러가 가 합성수임을 보임으로써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 무한 감소(강하)법(method of infinite descent)

 

          이 방법은  페르마가 많은 발견들을 하도록 한  일반적인 방법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입증하는데 특히 유용하다.  이는 양의 정수에 관한 어떤 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증명하려면 반대로 그 관계가 약간의 특별한 양의 정수의 집합에 대하여 성립될 수 있다고 가정한 다음 더 적은 양의 정수들의 다른 집합에 대하여 같은 관계가 성립함을 보인다. 다시 이 방법을 쓰면 그 관계는 더욱 작은 양의 정수들의 다른 집합에 대하여 성립해야만 하고, 이것은 무한히 성립해야 한다. 양의 정수는 크기가 무한히 작아질 수 없으므로 처음 가정이 틀렸고, 따라서 본래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 점수문제(problem of the point)

 

   파스칼과 페르마의 서신 왕래가 동기가 되어 확률론의 기초를 낳은 토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서신 왕래에서 점수문제와 연관된 다른 문제들, 가령 두사람 이상 또는 능력이 다른 두 사람의 게임에서의 상금분배 문제에 영향을 미쳐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단서가 된 것이다.  1657년 호이겐수(Christiaan Huygens, 1629-1695)는 위 두사람의 서신 왕래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확률론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논문을 썼다. 1713년 야곱 메르누이의 <추측술>이 나올 때까지 이 분야의 가장 훌륭한 논문이었다. 이러한 개척자적 노력이 있은 후에, 드 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1667-1754), 다니엘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827) 등 다수의 다른 공헌자들이 그 분야를 발전 시켰다.


출처 : http://mathpark.kookmin.ac.kr/thpark/mathcomputer/history/analgeom.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