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15년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물리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인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켜 가속도의 경우도 다룰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등속도를 가속도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시키는 이론에서 중력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얻어내려는 아인슈타인의 의도는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무척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한편, 아직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주장과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뒤 약 3년 반 동안 중력에 관한 논의를 더이상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양자 가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견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을 전후한 시기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몰두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뉴턴의 중력이론과 푸아송 방정식에 상응하는 정역학적인 중력장 이론을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로렌츠 변환이 중력을 취급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중력장 방정식은 비선형 방정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마흐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심력은 물체의 절대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거대한 질량에 대한 상대적 회전이 원심력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할 때 이 마흐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 가서 마흐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열정은 점차로 식게 된다. 만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관성이라는 것은 국소적인 측지 방정식(geodesic equation)에 내재되어 있으며, 우주 다른 곳의 물질의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훗날 과학자들 사이에는 거대 규모의 우주적 전체론과 국소적 작용 원리(local-action principle)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리만 기하학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유도해내지 못하자, 리만 기학학이 지니는 물리적 의미를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포기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페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10개의 텐서 방정식을 풀 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이 있는 비앙키 일치식(Bianchi identities) 때문에 10개의 자유도가 6개로 주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텐서 방정식의 자유도를 다시 10개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조화 좌표 조건'(harmonic coordinate condition)과 같은 특정한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기학에서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맥스웰 방정식을 표현할 때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 때문에 4개의 자유도를 가진 전자기 방정식이 자유도 1개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로렌츠 게이지라는 것을 선택해서 다시 4개의 자유도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페이스는 1915년의 아인슈타인 논문에서는 1913년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화 좌표 조건'에 관한 논의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1913년 당시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리만 기하학에 의한 중력장 방정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장 방정식을 얻기 5일 전인 11월 20일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도 변분법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중력 장 방정식의 최종적인 식을 얻어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괴팅겐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었고, 이것에 자극을 받아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아인슈타인도 그때까지는 풀지 못했던 일반 상대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연구 전통 속에서 전자론과 중력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사영기하학에 바탕을 둔 변환군론에 이미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괴팅겐의 수학교수였던 리만이 발전시킨 비유크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이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전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수학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 성향을 보였다.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던 로렌츠의 주장을 비판한 에밀 콘(Emil Cohn)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역학의 문제와 전자기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상대론적인 비선형 장방정식을 시도했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광양자 가설과 연관되어 발전해서 파동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에테르의 개념은 철저하게 거부되었지만,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광양자 가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발전했으며, 오히려 연속체론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물질과 에테르와의 구분을 비판했던 콘의 입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바일이 고안한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ation)과 괴팅겐 학자들이 선호했던 연속체론과 결합되면서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하려는 바일의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m)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등가원리는 부정되었고,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도 빛은 휘지 않고 직진하며, 중력 퍼텐셜은 텐서량이 아닌 스칼라 양으로 주어졌다. 이 노르드스트롬의 중력이론이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쌍벽을 이루는 중력이론으로서 어느 이론이 경험적 사실과 부합되느냐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로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슨(Frank Watson Dyson)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1919년 일식 때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 바로 다이슨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소위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식 관측대가 조직되게 되었고, 그 해 5월 29일 두 팀의 일식 관측대들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들을 얻어내었다. 관측대가 얻은 관측 결과는 실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는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긴급 소집한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 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는 관측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확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특히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써 당시에 대립하고 있었던 노르드스트룀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승리한 것으로 결판이 났으며,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더구나 11월 7일에는 런던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9년 11월 7일 20세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인슈타인의 신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바일은 이 통일장 이론에서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평생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그해 3월 28일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과학 정책이나 평화 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 부시 등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에게 보냈다. 이 건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39년 10월 핵문제를 자문할 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은 맨해튼 계획이라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계획이 추진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자탄이 개발된 뒤에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52년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버틀런드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한편, 아직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주장과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뒤 약 3년 반 동안 중력에 관한 논의를 더이상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양자 가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견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을 전후한 시기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몰두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뉴턴의 중력이론과 푸아송 방정식에 상응하는 정역학적인 중력장 이론을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로렌츠 변환이 중력을 취급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중력장 방정식은 비선형 방정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마흐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심력은 물체의 절대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거대한 질량에 대한 상대적 회전이 원심력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할 때 이 마흐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 가서 마흐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열정은 점차로 식게 된다. 만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관성이라는 것은 국소적인 측지 방정식(geodesic equation)에 내재되어 있으며, 우주 다른 곳의 물질의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훗날 과학자들 사이에는 거대 규모의 우주적 전체론과 국소적 작용 원리(local-action principle)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리만 기하학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유도해내지 못하자, 리만 기학학이 지니는 물리적 의미를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포기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페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10개의 텐서 방정식을 풀 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이 있는 비앙키 일치식(Bianchi identities) 때문에 10개의 자유도가 6개로 주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텐서 방정식의 자유도를 다시 10개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조화 좌표 조건'(harmonic coordinate condition)과 같은 특정한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기학에서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맥스웰 방정식을 표현할 때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 때문에 4개의 자유도를 가진 전자기 방정식이 자유도 1개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로렌츠 게이지라는 것을 선택해서 다시 4개의 자유도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페이스는 1915년의 아인슈타인 논문에서는 1913년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화 좌표 조건'에 관한 논의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1913년 당시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리만 기하학에 의한 중력장 방정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장 방정식을 얻기 5일 전인 11월 20일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도 변분법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중력 장 방정식의 최종적인 식을 얻어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괴팅겐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었고, 이것에 자극을 받아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아인슈타인도 그때까지는 풀지 못했던 일반 상대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연구 전통 속에서 전자론과 중력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사영기하학에 바탕을 둔 변환군론에 이미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괴팅겐의 수학교수였던 리만이 발전시킨 비유크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이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전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수학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 성향을 보였다.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던 로렌츠의 주장을 비판한 에밀 콘(Emil Cohn)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역학의 문제와 전자기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상대론적인 비선형 장방정식을 시도했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광양자 가설과 연관되어 발전해서 파동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에테르의 개념은 철저하게 거부되었지만,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광양자 가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발전했으며, 오히려 연속체론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물질과 에테르와의 구분을 비판했던 콘의 입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바일이 고안한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ation)과 괴팅겐 학자들이 선호했던 연속체론과 결합되면서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하려는 바일의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m)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등가원리는 부정되었고,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도 빛은 휘지 않고 직진하며, 중력 퍼텐셜은 텐서량이 아닌 스칼라 양으로 주어졌다. 이 노르드스트롬의 중력이론이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쌍벽을 이루는 중력이론으로서 어느 이론이 경험적 사실과 부합되느냐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로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슨(Frank Watson Dyson)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1919년 일식 때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 바로 다이슨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소위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식 관측대가 조직되게 되었고, 그 해 5월 29일 두 팀의 일식 관측대들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들을 얻어내었다. 관측대가 얻은 관측 결과는 실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는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긴급 소집한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 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는 관측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확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특히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써 당시에 대립하고 있었던 노르드스트룀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승리한 것으로 결판이 났으며,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더구나 11월 7일에는 런던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9년 11월 7일 20세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인슈타인의 신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바일은 이 통일장 이론에서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평생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그해 3월 28일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과학 정책이나 평화 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 부시 등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에게 보냈다. 이 건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39년 10월 핵문제를 자문할 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은 맨해튼 계획이라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계획이 추진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자탄이 개발된 뒤에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52년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버틀런드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